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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판결] 대법 "'왜 바로 저항하고 신고하지 않았느냐' 성추행 피해자에게 책임 물은 판결은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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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은 성범죄 사건에선 그것의 신빙성 판단 여부가 피고인의 유무죄와 형량을 결정 짓는 결정적 요소다. 그렇다면 피해를 당할 때 적극적으로 저항한 정황이 드러나지 않고, 범행 직후 즉시 신고하지도 않은 피해자의 진술은 믿을만한 걸까.

경기도 용인의 한 병원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에서 1·2심 판단이 엇갈린 가운데 대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한 2심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 기준이 적용됐다.

◆한달 동안 3번 성추행…1심 “피해자 진술 믿을 수 없다”

해당 사건의 강제추행 혐의는 2015년 1월 한달 새 총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첫 번째는 병원 내 간호사 탈의실에서였다. 병원 원장 강모씨는 밤 10시 야근 중이던 간호사 김모씨를 탈의실로 불러 무력을 사용해 강제추행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가해는 몇십분 간격을 두고 이뤄졌다. 강씨는 새벽 6시 병원 약국에서 피해자를 강제추행한 지 불과 30분 뒤 병원 진료실로 피해자를 불러 추가 범행을 가했다. 며칠 뒤 김씨는 병원을 그만뒀으나 경제적 사정으로 복직해 같은 병원에서 몇달 더 근무했다.

이 사건의 증거는 피해자 김씨의 진술이 유일했다. 김씨가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내놓은 진술의 신빙성을 법원이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강씨의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쟁점이었다.

지난해 8월 1심은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야간에 탈의실에서 발생한 첫 번째 추행 혐의에 대해 “해당 탈의실은 얇은 판넬로 돼 있어 방음이 전혀 되지 않고 옆 병실에 환자와 보호자가 있어 피해자가 소리만 쳐도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장소”라며 “(이 같은 장소에서)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고 강제추행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나머지 혐의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새벽 6시경 피고인으로부터 유사강간에 가까운 추행을 당했다고 하면서도 30분도 지나지 않아 피고인이 불 꺼진 진료실에 혼자 있는데도 순순히 들어갔다”며 “피해자의 행동은 강제추행을 당한 직후 통상의 피해자가 취하는 태도와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김씨의 ‘피해자 답지 못한’ 행동도 문제 삼았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피고인으로부터 3회에 걸쳐 추행을 당했다고 하면서도 즉시 항의하거나 신고하지 않았다”며 “강제추행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하면서 (복직해) 피고인과 함께 근무한 것은 상식에 비춰 납득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어 “나중에 피해자는 임금체불로 병원을 그만뒀고 계속해서 임금을 받지 못하자 피고인을 형사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며 “그런데 결국 임금체불이 아니라 강제추행만으로 고소한 것은 그 경위가 석연치 않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판결에 불복해 사건은 항소심으로 올라갔다.

◆2심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 충분히 고려해야”

10개월가량이 흘러 지난 5월 2심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을 뒤집고 징역 1년 및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 명령을 선고했다. 1심과 달리 2심은 “피해자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부터 법정에 이르기까지 추행을 당하게 된 상황 및 추행 방법, 추행이 종료된 이유 등에 관해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했다.

법원은 탈의실에서 이뤄진 첫 번째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피해자가 저항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혐의가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범행은 환자가 별로 없는 야간 시간대에 이뤄졌고 피해자는 건장한 체격의 피고인에게 제압당해 소리를 지르는 등 대응을 할 수 없었다”며 “벽이 얇은 판넬로 돼 있다고 하더라도 짧은 순간에 피해자를 강제로 추행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30분 차로 발생한 두 번째와 세 번째 혐의를 뒷받침하는 피해자 진술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진료실 안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가라’며 피해자를 계속해서 큰 소리로 부르자,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경우 향후 더 큰 위해가 가해질까봐 두려운 마음에 물건만 빨리 받으려고 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은 납득이 된다”며 “피해자 스스로 피고인이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성추행 피해를 입었음에도 같은 병원에 복직하고 뒤늦게 고소한 피해자의 사정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강제추행을 당한 후 병원을 그만뒀다가 복직한 것은 다른 자격증을 취득하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만 근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판단했다.

이어 “피해자는 처음엔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려 했으나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고 계속 괴로워 뒤늦게나마 고소를 결심하게 됐다고 진술했다”며 피해자의 고소 경위가 석연치 않다는 1심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이 맞다고 보고 강씨에게 실형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은 지난 4월 대법원이 최초로 제시한 성범죄 관련 소송 판단 기준을 적용한 판례로 평가받는다. 당시 대법원은 성범죄 사건 재판 시 “성범죄의 특수성, 특히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며 세 가지 심리 및 증거판단 기준을 내놨다.

△가해자 및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 안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는 진술은 그 의도를 쉽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점 △2차 피해가 생길까봐 가해자와의 관계를 끊지 않거나 가해자의 범행이 공론화된 후에야 피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는 점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위배된다는 점 등을 유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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