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내가 아는 몇몇 젊은이가 즐긴다는 휴가법이 있다. 집에 틀어박혀 며칠 동안 미드(미국 드라마)만 보는 것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처럼 한번 즐겨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 있다는 공상과학(SF) 미드 여행을 시작했다.
시리즈물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입해서 그런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스펙터클했다.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잔혹했다. 거기에 선정적인 장면이 끝없이 이어지고 기상천외한 이야기의 잔치가 벌어졌다.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판타지로 시선을 붙잡고, 인간이 좋아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로 사람들을 홀렸다. 마치 중독된 것처럼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자동으로 다음 편을 보게 됐다.
미드에 빠져 ‘정주행’을 마치고 나니 마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온 듯 몽롱하다. 통속적이고 자극적이라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권좌에 앉기 위해 짐승보다도 못한 행위를 일삼는 인간들의 모습은 드라마 속 세계인 것만 같지는 않아 가슴이 섬뜩해진다. 욕망이나 권력에 대한 집착의 결과는 드라마나 책 등에서 얻는 간접경험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러나 과장되고 충격적으로 표현된 불행한 결과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영원할 것처럼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이다.
미드 한 편 보고 쓰는 감상문치고는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내게는 작품이 내세우는 주제가 무겁게 와 닿는다. 《주역》에 의하면 인격은 없는데 지위가 높아선 안 되며, 능력이 없는데 큰일을 도모하려 하면 화를 입는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한다. 역사에서도, 드라마에서도, 고서에서도 볼 수 있는 전례들이 슬프게도 쳇바퀴처럼 반복돼 돌고 있다.
나 자신도 한 번 되돌아본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욕망과 욕심으로 분수에 넘친 일을 하지 않았나. 마지막 남은 삶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어떤 것부터 내려놓아야 할까. 어떤 것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할까. 생각이 넘치니 감상문에서 반성문으로 바뀐다.
이제 막 살 것 같은 계절이 눈앞에 살랑거린다. 아직 폭염이 사그라지지 않았고 며칠간 폭우도 쏟아졌지만, 맑고 시원하고 풍성한 계절이 우리를 기다린다. 여생을 잘 살고 싶은 마음, 인생을 잘 마무리하겠다는 화두를 안고 이번에는 아름답고 맑고 희망을 주는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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