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환자들 성지' 된 용산 전자상가
의료진 일탈행위·의료사고 대비
수술 앞두고 녹음기 구매 늘어
진료실 합법, 수술실은 불법
환자가 대화 참여하는 진료실
의사 동의여부 관계없이 합법
환자 의식없는 수술실 녹음은 불법
병원선 녹음 두고 실랑이
의사들 "소신진료 막는다"
환자들 "최소한의 안전장치"
[ 조아란 기자 ]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진료실 내 촬영 및 녹음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지난 22일 서울 강동구의 한 대학병원 진료실 출입문에는 이 같은 내용의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최근 진료 기록을 남기겠다며 무작정 녹음기를 꺼내드는 환자와 의료진이 서로 마찰을 빚는 사례가 늘면서 이 같은 조치가 나왔다. 이날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온 A씨(23)는 “의사의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피해를 보는 건 환자가 아니냐”며 “진료행위 녹음은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병원 관계자는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면 진료를 소신껏 볼 수 없을 것”이라며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수술 앞두고 녹음기부터 찾는 환자들
병원에서 녹음하려는 환자가 늘어난 것은 일부 의사의 일탈 행위가 언론에 잇따라 보도되면서다. 지난 6월 전북 전주의 한 이비인후과에서는 의사가 마취 상태의 환자에게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서울 강남의 한 성형외과에서도 마취 상태로 상의를 벗고 누워 있는 30대 여성에게 의사가 “가슴이 하나도 없다”는 등 성희롱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두 사건 모두 환자가 수술실에서 몰래 녹음한 파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의료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측면도 있다. 지난해 12월 이대목동병원에서 일어난 신생아 집단사망 사고, 올해 4월 배우 한예슬 씨 의료사고 등을 계기로 환자들의 불안도 커졌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사고, 의료분쟁 시 사고 입증의 책임은 환자에게 있다. 이 때문에 의료사고 전문 변호사들도 환자에게 사고 발생 직후 진료기록, 수술기록 등 증거물을 확보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병원 측에서 이 같은 자료 제공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초진 때부터 몰래 녹음하는 환자가 느는 이유다.
녹음기를 파는 서울 용산 전자상가도 중요한 수술을 앞둔 환자들의 ‘성지’가 됐다. 스마트폰에 녹음 기능이 있지만 병이 완치되거나 큰 수술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 전 과정을 녹음하려는 환자들이 이곳에서 대용량 녹음기를 주로 찾는다. 수술실 전용 녹음기도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전자상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최모씨(59)는 “최순실 사태 때는 도청탐지기, 워터파크 몰카사건 이후엔 몰카탐지기가 잘 나갔는데 올 들어선 수술실에 들고 갈 녹음기를 찾는 사람이 많다”며 “껌처럼 붙이는 지름 2㎝가량의 소형 녹음기를 이용하면 부분 탈의만 해도 될 때 옷에 부착하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진료 녹음은 합법, 수술 녹음은 불법
법조계에 따르면 진료 시 환자가 의사의 말을 몰래 녹음해도 불법은 아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제3자의 녹취가 아닌 대화에 참여한 당사자의 녹취는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합법으로 본다. 문진 시에는 의사와 환자 모두 대화에 참여하기 때문에 의사 몰래 은밀히 녹음해도 합법이다. ‘촬영 및 녹음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붙였던 병원 측도 “녹음 금지가 아니라 권고 수준의 안내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수술실에서 몰래 하는 녹음은 사정이 다르다. 한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는 “환자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의료진이 나누는 대화에 참여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게다가 (의료사고 입증 등) 분명한 목적을 갖고 동의 없이 타인의 대화를 녹취하는 것이므로 명백한 불법 행위”라고 설명했다. 2014년 녹음기를 주머니 속에 검정테이프로 붙여놓은 채 성형수술을 받고 나온 뒤 녹음 내용을 언론에 제보한 한 남성은 이후 해당 병원으로부터 “불법 녹음이 아니냐”고 항의를 받았다.
일각에선 불법으로 보기 모호하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의료진 간 대화라고 해도 주제가 환자라면 당사자로 볼 여지도 있다”며 “녹음 목적이 자신의 신변 보호이기 때문에 법원이 환자가 제출한 녹음 자료를 정황 증거로 받아들이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의료계 “안정지향적 시술로 환자 피해”
의료사고에 대한 환자들의 우려가 커지면서 진료실과 수술실에 폐쇄회로TV(CCTV) 설치를 의무화해달라는 요청도 빗발치고 있다. 24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이와 관련된 청원 글이 10개 올라와 있다. 자신의 어머니가 수술 중 돌아가셨지만 수술 당시 상황조차 알 수 없다며 법 개정을 요구하는 글은 현재 1만6000여 건의 동의를 받았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가 의식이 없는 채 폐쇄된 공간에 있는 것”이라며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자료로 제출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논의는 19대 국회 때부터 시작됐다. 최동익 전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3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이 같은 취지의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의료사고 발생 위험이 높은 수술에 대해 의료인이 환자 동의를 얻어 수술 장면을 CCTV로 촬영하고, 환자 요구 시 영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환자와 의료진의 사생활 침해를 우려한 의료계 반발로 결국 무산됐다. 집도의에게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고난도 수술은 촬영한다는 사실만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져 수술 결과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이유였다. 고려대병원의 한 의사는 “의료사고 등을 걱정하는 환자들의 입장도 이해는 하지만 CCTV 설치나 대화 녹음을 하면 향후 트집이 잡힐까봐 두루뭉술하게 말하게 되고 시술도 안정지향적인 것만 고집하게 된다”며 “이는 분명 의료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조아란 기자 arc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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