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 정치부 기자)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각국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포인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는 점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빠르면 이달 말 네 번째 방북, 김정은을 만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설까지 나오고 있다. 시 주석은 특히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에 평양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어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여기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다음달 11일 개막하는 동방경제포럼에 김정은을 초청한 상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9월 중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정은이 1년도 채 안되는 시간에 성취한 외교 성과는 눈부시다고 할 정도다. 한반도 주변 4강 중에서 일본만이 아직 김정은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지 않고 있는데 이 또한 조만간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 친미 위주의 외교정책에서 탈피, 최근 중국 러시아 등과의 접촉을 늘리고 있는 터라 한반도 비핵화에서도 ‘일본 패싱’을 막기 위해 아베 정부가 김정은을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한반도 비핵화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는 사실상 김정은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모두가 김정은의 결정만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문재인 정부가 운전자론을 넘어 주체론까지 거론하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하지만 현 청와대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냉정한 평가다. ‘평양’을 움직일만한 지렛대는 물론이고, 주변 4강과의 협상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이 같은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근본적으로 비핵화 과정은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러일 등 주변 4강의 이해관계와 매우 밀접히 연관돼 있다. 양자, 다자간 등 협상의 경우의 수만해도 엄청나게 많다. ‘약소국’ 북한은 이런 복잡한 국제관계를 매우 적절히 활용해왔다. 1989년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만해도 ‘평양’은 ‘모스크바’와 ‘베이징’ 사이를 오가며 그들만의 삼각외교를 펼쳤다. 사회주의 블록의 맹주 자리를 놓고 중소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득을 보는 건 늘 북한이었다.
1990년대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의 평양에 대한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하고, 중국이 ‘두 개의 코리아’ 정책으로 외교 노선을 바꾸자 북한은 한때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고립이 오래가진 않았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을 끌어들이면서 중국의 애를 닳게 하는 방식을 취했다.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시작으로 북한이 세계를 상대로 위기감을 조성하기 시작하자 글로벌 평화 유지군을 자처하는 미국은 빠르게 한반도 문제로 빨려들어갔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햇볕정책’ 역시 북한은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지렛대로 삼았다.
최근의 한반도 정세는 북한식 다자외교의 성공을 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한반도 주변 4강을 비롯해 싱가포르까지 끌어들이며, 전 세계로부터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사실상 인정받았다. 중국만해도 북한을 향해 끊임없이 핵무기 개발 포기를 종용해왔다. 중국처럼 글로벌 시장에 체제를 개방함으로써 경제적 성취를 얻는 것이 체제 존망에 더 이롭다는 게 중국의 일관된 대북정책이었다. 시 주석은 취임 이후 단 한차례도 평양을 가지 않음으로써 핵개발에 몰두한 북한에 대해 직설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시 주석의 이번 ‘9·9절’ 방북을 두고, 중국이 ‘핵보유국 북한’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정은 수렴 현상’이 발생하는 두번째 이유는 1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 북한 체제의 독특함이다. 북한은 김정은이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의 ‘비밀노트’가 김정은에게 그대로 전수됐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 통시성 면에서도 김정은의 정보는 협상 상대국들을 훨씬 뛰어넘는다. 한국만해도 여러차례 정권이 바뀌면서 대북 정책의 일관성이 흐트러졌다. 미국 역시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책이 다른 데다 특히 공화당 내에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그간 미국의 대북 정책 성과를 모두 흡수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욱 위험한 점은 김정은이 핵심 협상 파트너인 미국과 한국의 민주주의를 매우 적절히 활용할 줄 안다는 데 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상대방의 카드가 무엇인 지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만해도 김정은이 핵보유국임을 사실상 인정받은 채, 은둔의 왕국으로 숨어버릴 경우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뮐러 검사의 특검이라는 내부의 칼날 아래에 놓인 데다 미국 내 주요 언론 대다수가 트럼프의 일방주의적 미국 우선주의와 독선적인 정치에 반기를 들고 있다.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 역시 김정은의 손길이 절실한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낙관론을 펴면서도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이 선거에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끝)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