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 논설위원
제약산업이 국내 주요 산업으로 꼽히던 시절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만 해도 당시 업계 1위 동아제약 매출은 삼성전자나 금성사(현 LG전자) 매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두 회사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대다수 제약사들은 국내에서 안주했다.
작년 기준으로 매출이 1조원을 넘는 제약사는 유한양행과 GC녹십자뿐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제약산업 비중은 1.15%에 불과하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2%를 넘지 못한다. ‘세계 12위 경제대국’ 한국의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 제약산업이 이렇게 쪼그라든 것은 경쟁 촉진이 아니라 보호에 주력해온 정부 정책 탓이 크다. 건강보험에 적용하는 약가(藥價) 정책이 단적인 예다. 한국은 신약이 나오면 기존 약들과 이들의 복제약 등의 가중평균가를 기준으로 약가를 결정한다. 가격이 정해지더라도 초기 처방량이 많거나 새로운 복제약이 나오면 값을 더 깎는다.
보호 정책이 낳은 현실 안주
신약이 오랫동안 글로벌 제약사의 전유물이었기에 신약값은 낮게, 복제약 가격은 높게 책정했다. 국내 제약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다 보니 국내 제약사들은 위험 부담이 큰 연구개발보다 복제약을 생산하기 바빴다. 여기에다 정부는 2007년부터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약값 후려치기’를 강화해왔다. 지금의 약가 책정 구조가 마련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국내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에 나서면서 ‘낮은 약가’는 되레 제약산업의 글로벌 진출을 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신약 수입국은 한국 약값을 기준으로 약가를 정하기 때문이다.
2012년 터키 수출이 무산된 국산 고혈압 신약인 보령제약 ‘카나브’가 대표적인 사례다. 카나브에 책정된 약값은 670원(60㎎ 기준)이었다. 당시 비슷한 용량의 고혈압 치료제 약값은 700~900원대였다. 뛰어난 효능이 알려져 처방이 크게 늘어나 카나브가 10~15년 전 개발된 기존 약들보다 가격이 낮게 정해진 것이다. 처방이 많으니 생산단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낮은 약가'에 발목 잡힌 제약사
약가 책정을 둘러싼 제약사와 보건당국의 갈등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가 ‘카나브 사태’ 이후 신약 가격을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약가 책정 골격이 크게 변하지 않아서다.
최근에는 대화제약이 개량 신약인 항암제 ‘리포락셀’을 개발하고도 국내 출시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지난달 리포락셀의 건강보험 적용 약가는 시판 중인 항암제 복제약 최저가 기준으로 결정됐다. 중국 수출을 앞두고 있는 대화제약은 “약가를 받아들일 경우 수출 가격에 개발 원가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동아에스티의 슈퍼박테리아 항생제 ‘시벡스트로’도 낮은 약가 탓에 2년 가까이 국내 출시가 미뤄지고 있다. 시벡스트로는 다국적 제약사인 머크에 기술수출할 정도로 효능이 뛰어나지만, 2016년 책정된 약값은 미국 약가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동아에스티는 “다른 나라에서 미국 수준의 가격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시벡스트로’의 국내 출시를 늦춘 상태다.
신약이 적정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연구개발이 활성화되고, 국내에서 글로벌 제약사가 탄생할 수 있다. 신약 등 혁신 기술에 대한 보상을 늘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건강보험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과제이겠지만 지금처럼 신약을 개발해도 제값을 받지 못하면 개발 의욕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국산 신약 개발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국내 의료·보건산업이 글로벌 제약사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도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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