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이두용 작가의 여행 두드림 - 마닐라
필리핀 문화·역사 산책
스페인 사람들 모여살던
'인트라무로스' 옛 유럽 느낌
중심가 아얄라 애비뉴
뉴욕과 홍콩 섞어놓은 모습
필리핀을 검색하면 곧바로 ‘세부’가 나오고 그 뒤로 ‘팔라완’이 따라붙는다. 사실 관광지로는 ‘보라카이’가 으뜸인데 지난 4월 필리핀 대통령이 자연보호를 내세우며 6개월간 섬을 폐쇄했다. 필리핀은 동남아시아 휴양지의 중심이지만 수도 ‘마닐라’를 얘기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다. 오랜 식민지 역사를 통해 여러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배어 있는 곳. 필리핀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닐라를 걸어서 여행하면 색다른 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마천루 숲을 이룬 마닐라의 오늘
첫 동남아시아 여행지이던 태국으로 향할 때 코끼리가 울창한 숲을 걸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코끼리를 보지 못했다. 대신 세계적인 도시의 중심가처럼 하늘까지 뻗은 빌딩 숲과 으리으리한 인테리어의 백화점, 멀티플렉스, 박물관은 물론 깨끗하게 정비된 거리를 만났다.
마닐라도 정말 잘산다. 숙소가 있던 마카티(Makati)는 서울의 강남과 명동의 장점을 잘 조합해놓은 느낌이었다. 그 중심가 아얄라 애비뉴는 건물마다 호텔과 백화점, 쇼핑몰이 들어선 문화복합 지역이다. 얼핏 보면 뉴욕을 닮았고 자세히 보면 홍콩과 비슷하다.
동남아시아 나라들이 최근 급격한 성장을 이루면서 도심에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선진국의 장점을 모방해 큰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마닐라는 조금 다르다. 놀랍지만 지금의 화려한 도시가 사실 우리나라 서울보다 일찍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6·25전쟁을 겪고 힘들어하던 1950년대 필리핀은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제조업 분야에서 큰 성장을 이뤘다. 그 이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로 도약했고 오랫동안 부귀를 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높은 건물이 거의 없었던 시기에도 마닐라에는 미국인들이 세운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고.
필리핀, 스페인 국왕 필리피나스에서 유래
아무리 도심이 화려하다고 해도 서울이나 선진국의 수도와 비교하면 분명 다른 게 있다. 중심가와 외곽의 격차다. 가까운 번화가와 등을 맞댄 거리만 나가봐도 다른 나라에 온 듯 차이가 느껴진다. 마닐라도 그랬다.
하루를 비워놓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마닐라 산책에 도전했다. 지도를 펼쳐놓으니 걷기에는 생각보다 넓다. 가장 번화한 마카티 지역에서 마닐라 여정을 시작했다. 이날 낮 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는데 건물에 들어서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했다. 쇼핑센터가 많아 볼거리도 다양하다. 하지만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뜨겁고 습한 공기가 피부를 감싼다.
마닐라가 휴양지는 아니지만, 명실상부 필리핀의 수도다.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관광지가 여럿 있다. 필리핀은 수백 년간 여러 나라의 통치를 받았다. 좋든 싫든 다양한 문화가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리핀이란 국가명이 이곳을 가장 오래 통치했던 스페인의 국왕 이름에서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6세기에 이곳에 파견된 탐험가 빌라로보스가 당시 스페인 황태자인 필립의 이름을 따서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스페인은 1565년 필리핀을 정복했고 300년 넘게 통치했다. 이후 필리핀은 1898년 독립을 선언했지만,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으로 다시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이후 1943년엔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한다. 1945년이 돼서야 미국군이 재탈환해 비로소 독립했다.
마닐라 속 작은 스페인, 인트라무로스
300년 넘게 스페인 지배하에 있던 터라 마닐라엔 스페인 문화를 오롯하게 볼 수 있는 지역이 있다. 필리핀이란 나라 이름마저 스페인 국왕 이름에서 나왔다지만 처음엔 필리핀과 스페인이 쉽게 오버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서면서 무릎을 쳤다. 바로 인트라무로스(Intramuros)다. 이곳은 ‘성의 안쪽’이란 뜻을 가졌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치하던 시기, 스페인 사람과 스페인계 혼혈만이 이 성의 안쪽에 거주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엔 가장 아래쪽에 성 어거스틴 성당이, 중앙엔 마닐라 대성당이, 가장 위쪽 바다와 마주한 곳엔 산티아고 요새가 있다. 이 셋을 포함한 인트라무로스가 마닐라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인트라무로스에 들어서면 과거 스페인 거리를 걷는 느낌이 든다. 이따금 마차가 지나면 그 기분은 최고조가 된다. 성 어거스틴 성당은 중세 유럽의 성당 느낌과 흡사하다. 가톨릭이 국민의 83%나 되는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한편에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안쪽에는 당시 사용하던 제품과 기록, 그림 등이 전시돼 있다. 계단만 몇 걸음 올라가도 유럽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런 이유로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다. 마닐라 대성당은 인트라무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공기가 맑아 푸른 하늘과 성당의 십자 탑이 조화를 이룬다. 더운 날씨였지만 우리나라 가을 하늘처럼 아름답다. 주변엔 산책하거나 잔디에서 쉬는 사람이 많다. 인트라무로스는 마닐라 속의 다른 땅 같은 느낌이 더했다.
가장 위쪽 산티아고 요새로 향했다. 마닐라 대성당에서 300여m 떨어져 있다. 하지만 필수 코스니 반드시 보자.
이곳은 필리핀 독립 영웅인 호세 리살(Jose Rizal, 1861~1896)이 사형 선고를 받은 곳으로 스페인 통치 시절의 감옥과 호세 리살 박물관이 있다. 바다로 향하고 있는 요새의 대포와 근처 연못, 넓은 광장이 인상적이다.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과거 소래포구를 연상케 한다.
영원한 필리핀의 영웅 호세 리살
산티아고 요새에도 호세 리살의 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려면 인트라무로스 아래쪽에 있는 리살 파크에 들러 보는 게 좋다. 필리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아직도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다. 호세 리살은 필리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의학을 공부하기도 한 인재였다. 그는 스페인에 머물 때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부당하고 필리핀 국민이 억압받고 있다고 느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필리핀 식민지 개혁을 요구하는 언론 활동에 참여해 소설을 쓰고 개혁 운동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하지만 민중 폭동을 일으킨다는 혐의로 체포돼 1986년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공개 처형됐다. 자연스레 우리나라 일제강점기가 떠올랐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호세 리살과 같은 마음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을 텐데…. 순간 우리와 닮은 구석이 많은 필리핀에 애착이 생겼다.
리살 파크 한편에는 리살의 처형 장면을 재현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처형되기 전 남긴 ‘나의 마지막 작별’이라는 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리살 파크는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과 넓이도 모양도 비슷하다. 다만 빌딩 숲에 있는 게 아니어서 마닐라 사람들의 휴식처이자 독립을 기념하는 장소로 쓰인다.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다가 울타리 안쪽에 있는 필리핀·한국 우정의 탑을 발견했다. 6·25전쟁 당시 필리핀이 미국, 영국 다음으로 참전한 걸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한글로도 쓰여 있었다.
필리핀 하면 자연스레 넓은 바다와 푸른 하늘을 떠올렸는데 마닐라 관광지를 걸으면서 태양보다 뜨거운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마닐라=글·사진 이두용 여행작가
sognomedia@gmail.com
여행 메모
인천공항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는 약 4시간이 걸린다. 항공편은 의외로 많다. 직항으로는 아시아나항공과 대한항공, 필리핀 국적기인 필리핀항공이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주 7일 매일 두 번 운항한다. 이밖에도 제주항공이 주 7일 하루 한 번 운항한다. 날짜만 잘 고르면 요일 상관없이 눈높이에 맞는 항공사를 선택해서 직항으로 갈 수 있다.
필리핀을 여행할 땐 치안 걱정을 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주요 관광지나 도시는 위험하지 않다. 필리핀 관광청이나 안내서, 가이드북 등에서 주의를 요하는 지역만 가지 않으면 사고가 날 위험은 크지 않다.
이동수단은 택시를 추천한다. 호텔에서 출발할 경우 반드시 입구에서 타는 게 좋다. 택시에 승차하면 요금표시기인 ‘미터기’를 켜도록 요청해야 내릴 때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 필리핀의 대표 이동수단은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이 있다. 지프니는 2차 세계대전 후 남겨진 미군 지프차를 개조한 것으로 버스 역할을 한다. 저렴하지만, 정확한 노선을 모르면 타지 않는 것이 좋다. 잘못 내리면 돌아가는 게 더 큰 수고가 된다. 트라이시클은 오토바이 옆과 뒤에 좌석을 만들어 운행하는 교통수단인데 요금이 정해져 있지 않아 부르는 게 값이다. 흥정하는 맛은 있지만, 택시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는 경우도 많다. 인트라무로스는 곳곳에 입장료가 있으니 잔돈을 준비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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