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베네수엘라가 최후의 ‘디폴트 타개책’으로 이달 20일부터 화폐개혁을 추진한다. 실질적으로 화폐 기능을 상실한 볼리바르화를 10만 분의 1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 뒤 곧바로 첫 공식 가상법정화폐인 ‘페트로(Petro)’에 연계시킨다는 계획이다. 금융위기 이후 가장 급진적인 화폐개혁에 해당한다.
일반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거래편의 제고 △회계기장 처리 간소화 △물가 기대심리 억제 △대외위상 제고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불안 △부동산 투기 심화 △화폐주조와 신·구권 교환비용 증가 등 단점도 만만치 않다.
베네수엘라 경제가 파탄 난 지 오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경제성장률은 -18% 이상으로 추락하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00만%에 달해 악성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빠질 전망이다. 특히 화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인 물가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최근 짐바브웨에서 발생한 초(超)인플레이션에 해당한다.
2000년 이후 각국은 앞다퉈 신권을 발행했다. 2013년 미국은 20달러, 50달러, 100달러짜리를 새롭게 도안했고, 이듬해 일본도 1만엔, 5000엔, 1000엔짜리 신권을 내놓았다. 터키 모잠비크 짐바브웨 북한 등도 신권을 발행했다. 특히 2016년 인도는 전체 화폐유통물량의 86%를 차지하는 구권 500루피, 1000루피를 신권 500루피, 2000루피로 교체했다.
국가별로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신권을 발행해 목적을 달성한 국가에선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기존 화폐를 완전히 대체하되, 다른 하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병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 선진국이 해당되고 신흥국 중에서는 인도가 유일하다.
인도 이외 신흥국은 리디노미네이션을 결부시켜 신권을 발행했다. 그후 이들 국가는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대외위상 제고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가가 앙등하고 부동산 투기가 거세게 불면서 경제가 더 불안해졌다. 베네수엘라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베네수엘라가 화폐개혁 조치를 발표하자 우리 경제 내부에서도 한동안 잠복됐던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만큼 우리 경제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위상 간 불균형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면에서 우리는 선진국에 속한다. 하지만 부패도지수, 지하경제 규모 등으로 평가되는 소프트웨어 면에서는 신흥국으로 분류된다.
오히려 포트폴리오상 투자 지위는 더 퇴보했다. 하드웨어 위상을 중시하는 파이낸셜타임스(FTSE) 지수로는 선진국으로 분류된 지 10년이 됐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위상을 중시하는 모건스탠리(MSCI) 지수에서는 2015년 연례 점검부터 선진국 예비명단에서 빠지면서 신흥국으로 전락했다.
우리와 같이 선진국과 신흥국의 중간자 위치에 있는 국가는 지금과 같은 글로벌 경제 전환기에 쏠림현상이 심하게 나타난다. 좋을 때는 선진국 대우를 받으면서 외국자금이 대거 유입된다. 하지만 나쁠 때는 신흥국으로 전락해 들어왔던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큰 어려움이 닥친다. 이른바 ‘경기 순응적 샌드위치 쏠림현상’이다.
우리 국민의 화폐생활에서 경제 규모가 커졌지만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액면 단위는 그대로 유지돼 회계 단위가 경(京)원에 이르렀다. 각종 가격은 1000분의 1로 축소해 표시한 지 오래됐다. 종전에 ‘5000’으로 표기했던 자장면 한 그릇 값을 ‘5.0’으로 표기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추진할 필요성과 여건도 일부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우리 경제의 대내외 정세는 어수선하다. 경기는 더 어렵다. 1980년 2차 오일 쇼크, 1998년 외환위기 직후와 같은 특수한 여건이 아닌데도 한국과 미국 간 성장률이 역전됐다. 경기순환상으로 장기침체 진입을 예고하는 ‘트리플 딥’ 조짐까지 감지되고 있어 ‘중진국 함정’에 빠질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올 정도다.
법화(法貨·legal tender) 시대에서 신권을 발행하는 것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은 없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면 더 그렇다. 일부에서는 대내외 정세가 혼탁한 최근과 같은 상황에 기습으로 단행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으나 위험한 발상이다.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야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의 목적을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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