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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청천강 전투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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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6·25전쟁이 터진 지 약 넉 달 만인 1950년 10월19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여세를 몰아 평양을 점령했다. 곧 압록강까지 적을 몰아붙이고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공은 북한 땅에 자유주의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만주에 있던 제4야전군 26만 명을 1차로 투입했다.

첫 전투는 10월25일 청천강 일대에서 벌어졌다. 그때까지 중공군 참전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아군은 적의 야간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최일선에 있던 국군 제2군단이었다. 예하 3개 사단이 궤멸됐다. 미 육군 제2사단도 적의 포위망에 걸려 와해됐다.

1차 공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일시 후퇴하면서 북한군에 방어를 맡겼다. 우리 측은 그들이 철수한 것으로 오판했다. 청천강 북방과 묘향산에 숨어 있던 중공군은 11월25일 밤 또다시 총공세를 펼쳤다. 이후 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후퇴하고 서울까지 도로 뺏겼다가 되찾았다.

청천강 전투의 패배는 주한 유엔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맥아더 장군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군사 전문가들은 당시 실패의 교훈을 몇 가지로 정리했다. 가장 큰 것은 ‘정보 실패’였다. 중공군의 개입 사실뿐 아니라 병력 규모도 몰랐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흰색 설상위장복으로 항공정찰을 피하며 밤에만 이동하던 중공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또 하나는 ‘판단 실패’였다. 중공군의 전투능력을 너무 얕잡아봤다. 수십 년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그들은 나름의 정예병이었다. 과감한 우회전략과 산악 매복, 백병전에도 능했다. 그런 군사 15만 명이 청천강에 투입됐다. 아군은 4만5000명에 불과했다.

‘전투 방식 실패’까지 겹쳤다. 중공군의 위장술과 야습을 과소평가한 탓이다. 그들은 유엔군의 근접 항공지원을 막기 위해 산에 불을 질러 연기로 정찰을 방해했다. 산악이 많은 한국 지형에서 산길을 타고 침투해 주요 도로로 기동하는 미군 병력과 포병부대를 공격했다. 밤에 꽹과리와 나팔로 공포감을 조성하며 습격하는 인해전술도 위협적이었다.

이 전투에서 2만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포로가 된 미 2사단의 스티븐 얼타모 소령과 앨프리드 벤싱어 주니어 중사는 이듬해 1월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들의 유해는 최근 미국으로 송환됐다. 어제도 미군 유해 55구가 하와이에 도착했다.

북녘에 남은 미군 유해는 청천강 주변 1500구, 장진호 일대 1024구 등 5300여 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군 유해는 더 많다. 비무장지대에 묻힌 1만여 구를 포함해 3만 구 이상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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