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과정 '공개'가 빚는 문제 많은데
'구성원 직접 선출론'까지 등장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식은 없어
기업 경영마저 '정치실험'은 곤란
여덟 번 연속된 '회장 중도 하차'
경영성과 아닌 '외풍'으로 흔들어서야
이학영 논설실장
포스코가 진통 끝에 차기 회장 선임을 끝냈지만, 잡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전임 회장 비리를 덮어줄 사람을 고른 것 아니냐”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엊그제 발언이 대표적이다. 포스코 회장이 ‘비리’를 저질렀고, 회사 측은 그런 ‘비리’를 덮을 적임자를 후임 회장으로 뽑았다는 주장이 새로울 건 없다. 권오준 회장이 중도 퇴진을 선언한 지난 4월 이후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서 숱하게 불거져 나온 얘기였다. 그러나 집권당 실력자가 공개석상에서 대놓고 한 말은 무게가 다르다.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홍 원내대표 말대로 포스코 회장이 후임자를 ‘바람막이’로까지 써가며 덮으려고 하는 비리가 있고, 그런 사실을 여당이 인지하고 있다면 즉각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했다. 그게 아니고 ‘심증’을 뱉어낸 말이었다면 대단히 경솔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당사자 개인의 명예 문제 이전에 세계 5대 철강회사의 CEO라는 자리를 ‘비리 방탄용’으로 깎아내린 셈이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신임 회장 후보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포스코그룹의 100년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혁신적인 리더십’으로 정의하고 글로벌 역량, 혁신 역량, 핵심 사업에 대한 높은 이해 및 추진 역량을 중점적으로 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직무 정의(mission statement)’가 이런 것인데, 책임 있는 여당 정치인에 의해 졸지에 희화화돼 버렸다.
“포스코 최고경영자(CEO) 선출 과정은 투명하고 제도화돼야 하며, 포스코 구성원들이 직접 회장을 뽑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 홍 원내대표의 ‘대안 제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포스코의 이번 회장 선임 과정에서 가장 많이 제기된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회장 후보자 모집 과정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깜깜이 작업’이라는 것이었다. 회장 지원자를 단계마다 공개해서 투명성을 높이는 게 바람직한지 여부는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간판 철강회사의 사령탑을 ‘밀실’에서 추려내는 게 나쁘다는 주장의 논거만큼이나, ‘슈퍼스타 K’ 신인 가수왕을 뽑듯 모든 지원자와 선발 과정을 까발리는 데 따르는 문제점도 수두룩하다.
공개모집의 대표적 단점은 적임자들이 신원 노출을 꺼려 지원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 현대자동차 등 민간 기업에서 역량을 검증받은 현직 경영인이 ‘새로운 포부’를 펼쳐보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든다. 어차피 임기가 돼 물러나야 할 현직 임원이나 회사를 떠나 실직 상태에 있는 전직 등으로 ‘인재 풀’을 좁힐 수밖에 없다. GM, GE를 비롯한 어떤 해외 거대기업에서도 ‘투명한 공개절차’를 통해 CEO를 선임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구성원들이 직접 회장을 뽑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더 큰 논란의 소지가 있다. 기업 회장을 직원들 투표 등의 방식으로 선임할 경우 어떤 문제가 야기될지는 주변의 몇 가지 예만 둘러봐도 금세 알 수 있다. ‘민주화’ 바람을 업고 총장 직선제를 도입한 국내 대학들의 모습이 살아있는 사례다. 무엇보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기업 CEO 직선제’를 도입하자는 발상 자체의 위험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과 획일적인 근로시간 단축 밀어붙이기 등 살아있는 경제현장을 실험 대상으로 삼으면서 온갖 혼란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이다. 기업 경영마저 ‘정치화 실험’을 해보자는 것이어선 곤란하다.
포스코 회장 선임 과정에서 불거진 잡음과 제기된 문제들을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포스코의 가장 큰 문제는 박태준 초대 회장 이후 여덟 번 연속으로 역대 회장들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중도 하차했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정권의 압력과 외풍을 견뎌내지 못한 탓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해야 할 과제는 포스코가 다시는 정치에 흔들리지 않도록 경영시스템 정비를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권오준 회장은 4년 전 취임한 이후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올렸고, 60조원대 매출을 회복했으며, 주가를 최근 2년여 동안 두 배로 올려놨다. 경영자가 경영성과가 아니라 ‘정치’에 의해 진퇴를 결정짓는 비극은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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