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기 정치부장) “정치는 단념의 기술입니다.”
92세를 일기로 지난 23일 삶을 마감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그의 유언집 <<남아있는 그대들>>에 남긴 글이다. ‘정치 9단’으로 불렸던 그는 30대에 중앙정보부장(사진 모습)과 국회의원, 당 대표를 지냈고 9선 의원으로 국무총리를 두 번이나 역임했다.
영욕의 한국 현대사를 함께 한 JP에게 과연 정치란 무엇이었을까. 5·16 군사쿠데타와 3당 합당, DJP연합이라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3번이나 던지며 한국의 정치사를 바꾼 JP가 마지막으로 남긴 정치의 본질은 역설적으로 ‘단념’이다.
“정치란 해야 할 일은 어김없이 해내고, 해서는 안 될 일은 단념하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따지고 보면 역사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저지르는 과오들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지는 잘못들의 기록입니다. 즉, 일의 완급과 선후를 가려 순리에 맞게 다스리는 것이 바로 정치 기술입니다.”
그에게 안될 일을 한 경우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빚어지는 잘못은 무엇이었일까. 그는 전직 대통령의 말년을 예로 들며 역사의 평가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포함해 역사의 공과(功過)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과(功過)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평가하자는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도, 저도, 전두환 정권도, 모두 공이 있고 과가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도 과가 크긴 했지만 공도 없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혁명이나 갑작스런 사고 등으로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했으니까요.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총격으로 숨졌고, 최규하 대통령은 중간에 물러났습니다. 최근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행을 당해 임기 중 파면이 되었습니다.”
JP는 그러나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 전개되는 법”이라며 “과거는 그대로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를 그대로 두고 공으로든 과로든 받아들여, 전승하든 배척하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9단’으로 불린 JP는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치욕의 역사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역사의 평가는 동시간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에 오는 역사가에게 맡겨 둬야 합니다. 정치인이 역사를 단죄하려 들면 역사를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역사의 영광은 나누고 치욕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후세가 발휘해야 할 지혜입니다.” (끝) /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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