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사설] 지출 구조조정 없는 재정 확대, 뒷감당 어떻게 할 건가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는 과거 재정위기를 겪었던 이탈리아발(發) 금융위기설이 심각하게 불거진 상황에서의 행사여서 더욱 관심이 갔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과제’를 실천하기 위한 재원 조달과 배분 방향이 대통령 주재로 심도 있게 논의됐다고 한다. 분산돼 있는 일부 기금을 통·폐합해 복지 재원을 마련한다는 정도가 주목되지만, ‘재정 확장’ ‘예산 팽창’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회의에서는 일자리와 저출산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정부가 더 적극 나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재정 지출 확대가 불가피하다거나 당연하다는 논의가 주를 이뤘다. 한마디로 재정 확대 기조를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다.
고용 창출과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정책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하지만 해묵은 이 숙제가 돈으로, 특히 재정 투입으로 풀릴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꽤 많다. 특히 일자리 창출은 기업과 민간 영역에 더 맡기고 정부는 규제완화와 신(新)성장동력 창출의 분위기 조성에 적극 나서라는 주문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앞서 정부가 세워둔 2022년까지 중기 재정지출증가율은 5.8%인데, 이를 더 끌어올리자는 방안도 거론됐다. 역시 문제는 재원이다. 어제 발표된 KDI의 경제성장률 전망을 보면 올해 2.9%로 내려앉고, 내년에는 2.7%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고됐다. 지금까지와 같은 세수(稅收) 호조를 앞으로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이미 자가증식에 들어간 복지예산은 어느 한쪽도 손대기가 쉽지 않다. 경제성장률의 두 배를 웃도는 증가세인 재정지출이 얼마나 지속가능하겠는가. 현 정부 임기가 끝난 뒤에는 어떤 상황이 돼 있을까. 그런 차원에서 대안으로 기금 통·폐합 얘기도 나왔겠지만, 기금은 기금대로 촘촘히 쓰임새가 있고 그것만 바라보는 이해집단이 정부 안팎에 포진해 있다.
문 대통령은 재정 확대 필요성을 길게 설명한 뒤에 “아주 어렵고 미안한 주문이지만 과감한 지출구조조정을 위해 각 부처 장관들이 적극 협력해 달라”는 언급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비대해지는 재정이 최소한 ‘생산적 재정’이 되려면 정부의 지출예산에 대한 구조조정도 기획재정부 책임하에 주요한 정책으로 설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어난 재정의 부담은 고스란히 다음 세대가 떠안을 수밖에 없고, 나라 경제의 성장잠재력 저하도 불가피해진다.
저소득층 지원 등 격차 해소, 경기 활성화를 위한 마중물 등으로 재정을 동원하는 것은 필요성이 인정된다. 하지만 건전 재정의 둑을 무너뜨리는 순간, 정부가 하고 싶은 최소한의 업무도 어려워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은 물론 준(準)기축통화인 엔을 보유한 일본 등과 달리 우리는 건전한 재정이 경제위기를 예방하는 든든한 보루다. 경기가 침체될수록 재정의 건전성은 더 긴요해진다. 조선·해운 같은 분야 외에 또 어느 쪽에서 산업구조조정 필요성이 대두돼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잔뜩 불안해진 국제금융이 위기라도 초래하면 건실한 재정 외에 우리 경제가 기댈 곳은 없다. <한국경제신문 6월1일자>
사설 읽기 포인트
저출산과 고령화, 일자리 창출 등
재정으로 모든 문제 해결하려는 것은
국가 미래 방치하는 미봉적 처방
일자리 창출은 기업에 맡겨야
온 나라를 ‘비상사태’로 몰아넣는 경제위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다가온다. 1997년 말 한국이 겪은 국가부도 상황은 ‘외환위기’였다. 나라 안에 ‘국제 통화 달러’가 고갈이 나면서 당장 석유 가스 등 필수 에너지와 식량 수입 결제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이탈하는 외국 자본을 막고 새로운 달러가 들어오게 해야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에 돈을 빌려준 국제통화기금(IMF)은 무서운 조건들을 내걸었다. 기업 구조조정, 기업과 은행 제도의 선진화, 부채 축소 등 가혹한 이행 조건을 우리는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을 전후해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5개국(PIIGS)에서 나타난 남유럽 재정위기는 양상이 또 달랐다. 정부 곳간이 비면서 국가신용등급 하락, 자본 이탈, 극심한 경제침체로 이어진, 말 그대로 ‘재정위기’였다. 2007~2008년 월가의 공룡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비롯된 세계의 위기는 ‘금융위기’에 해당한다. 이때는 파장이 전 세계로 바로 퍼져 글로벌 금융위기로 불렸다. 당연히 한국의 금융업계에도 악영향이 미쳤다.
최근 아르헨티나, 터키 등에 이어 이탈리아발(發) 금융위기설이 나돌았다. 이런 나라의 낙후된 정치, 미진한 구조조정, 취약한 국가 재정이 결합된 것이었다.
어떤 경우의 위기든 이를 돌파할 가장 중요한 대비책은 건전한 국가 재정이라는 점을 강조한 사설이다. 나라 살림이 탄탄하고 여유가 있으면 웬만한 위기는 사전 예방이 가능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예산 지출은 쉽게 늘리면서도 긴축 재정에 대한 의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 창출이든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든 일반 복지든 재정을 확대하겠다면 쓰는 돈도 줄여야 한다. 지출의 구조조정이다. 그래야 정부가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전에는 이렇게 재정을 건실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대통령 주재로 국가재정전략회의(사진)가 열렸다. 각 부처 장관들, 여당의 고위급 당직자들, 청와대 산하 자문위원장 등이 다 모이는 중요한 연례행사다. 그런데 올해는 지출 구조조정도, ‘예산을 아껴 쓰고 꼭 필요한데 집행하자’는 얘기는 별로 들리지 않아서 걱정이다. 저마다 지출 확대만 외칠 뿐이었다. 당장은 큰 지장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학생 청년세대들이 성인이 돼 경제활동을 할 때 다 갚아야 할 빚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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