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배철현의 그리스 비극 읽기 (2) 괴물(怪物)
서양문명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했다. 아테네 지식인들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서양문명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거룩한 끈을 마련했다. 이 끈은 인간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두 가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정전(正典)’이라 부른다.
한 이야기는 오늘날 터키에서 만들어졌다. 호메로스가 셈족어인 페니키아 문자를 빌려 인도유럽어인 그리스 문자를 급조해, 기원전 8세기경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기록했다. 나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처럼 호메로스가 고대 그리스 문자를 창제했다고 믿는다. 호메로스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쟁과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기원전 12세기 이전, 지중해 지역의 음유시인들에 의해 널리 회자되던 전설이다. 당시 소아시아 에베소스에 살던, 혹은 그리스 아테네에 살던 범인(凡人)들도 영웅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어떻게 ‘명성(名聲)’을 획득했는지,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에서 자신의 고향 아타카로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돌아와 다시 왕이 됐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명성’과 ‘귀향’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가 추구한 ‘명성’이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동시에 허무한지 이야기한다. ‘명성’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클레오스(kleos)’는 순간을 사는 인간에게 불멸을 부여하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목숨을 요구하기에 이중적이다. 《일리아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킬레우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키지만, 신들의 결정 때문에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무심코 쏜 화살에 발꿈치를 관통 당하며 자신에게 명성을 선물한 트로이에서 장렬하게 죽는다. 발 뒤꿈치 뼈에 붙어있는 아킬레스건(Achilles腱)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명성’이 이중적이며 역설적이란 사실을 알려준다.
《오디세이아》는 자신이 존재해야 할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려준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 10년 동안 참전한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꼭 10년이 걸렸다. ‘귀향(歸鄕)’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인 영어단어 ‘노스탤지어(nostalgia)’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했다. ‘귀향’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즉 자신이 반드시 찾아서 거주해야 할 본연의 장소로 돌아가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여정을 의미한다. 내가 있어야만 하는 본연의 장소를 찾는 과정은 영웅적이다.
‘다름’과 ‘타부’
두 번째 이야기는 오늘날 이집트에서 전해온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문자뿐만 아니라, 문자가 통용되는 문화적이며 추상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 공간을 ‘폴리스(polis)’라고 불렀고, 최초의 도시를 고대 이집트의 가장 찬란한 도시 이름을 따서 ‘테베(Thebes)’라고 불렀다.
그들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도시란 혈연과 지연을 넘어서는 ‘다름’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수용하는 공간이다. 그들은 이 ‘다름’을 고대 그리스어로 ‘하이기오스(haigios)’라고 불렀다. 하이기오스는 ‘다름’이라는 뜻과 함께 ‘거룩’이라는 의미가 있다. 테베라는 도시는 다름과 거룩의 상징이다. 테베로 진입하려는 사람은 무시무시한 공간인 성문 앞 ‘경계(境界)’를 통과해야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경계의 공간에 ‘괴물(怪物)’을 배치했다. ‘괴물’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몬스터(monster)’는 괴물의 기능을 설명한다. ‘몬스터’는 ‘손가락으로 지적하다, 보여주다’라는 라틴어 동사 ‘몬스타레(monst re)’에서 유래했다. 괴물은 도시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서 손가락으로 그 경계를 표시하며, 도시로 진입하려는 사람을 막아서며 질문(質問)한다. 도시라는 거룩한 공간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결해야 한다. 도시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경계와 괴물을 가장 잘 표현한 문헌이 있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死者)의 서(書)’다. 고대 이집트 제19왕조 때의 후네페르(Hunefer)는 파라오 세티 1세 시절 제사를 관장하던 서기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을 그림과 문자로 파피루스에 담았다. 이것이 ‘사자의 서’다.
이야기는 파피루스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에서 끝난다. 시체를 방부처리하는 신 ‘아누비스(Anubis)’는 자칼 머리를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중간적인 존재들은 ‘하이브리드’다. 아누비스는 후네페르의 손을 잡고 심판의 장소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는 천칭으로 무게를 재고 있다. 천칭 왼편에는 후네페르의 심장이, 오른편에는 타조 깃털인 ‘마아트(Maat)’가 올려져 있다. ‘마아트’는 이집트어로 우주의 원칙이면서 개인이 일생을 통해 완수해야 할 고유한 임무다. 고대 이집트어로 심장을 ‘입(Ib)’이라고 부른다. ‘심장’은 개인의 감성, 지성, 그리고 개성을 간직한 장소다. ‘심장’과 ‘타조 깃털’이 평형을 이뤄야 다음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오른편에 서 있는 문자와 기록의 신 ‘토트’는 후네페르가 지상에서 한 일을 일일이 낭송하고, 판결문을 적는다. 왼편에는 토트를 응시하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바로 ‘암무트(Ammut)’다. 만일 ‘심장’과 ‘타조 깃털’이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암무트가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버려진 자’ 즉 무명이자 무존재가 된다.
암무트는 괴물이며 하이브리드다. 머리는 악어, 몸은 사자, 그리고 다리는 하마다. 그는 경계의 존재로서 후네페르가 사후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토트의 판결을 기다린다. 만일 후네페르가 일평생 자신의 고유 임무를 깨닫고 완수하려고 노력했다면, 그는 이른바 ‘말이 진실한 자’가 된다. 오른편 송골매 머리를 한 태양신 ‘호루스’가 후네페르를 부활의 신 ‘오시리스’에게 인도한다. 후네페르는 두 손을 앞으로 들고, 재판을 관장하고 있는 신들을 찬양하고 있다.
스핑크스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는 이집트 기자(Giza)의 스핑크스와 유사하다. 사람의 얼굴, 사자의 몸, 독수리 날개, 그리고 뱀의 꼬리를 가졌다. 이집트 스핑크스는 남성이지만 그리스 스핑크스는 여성이다. 스핑크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목을)조르다’란 의미를 지닌 ‘스핑코(sphingo)’에서 유래했다. 아마도 밀림의 왕자인 사자가 다른 동물을 사냥할 때 목을 물어 질식시켜 죽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괴물에 ‘목을 졸라 죽이는 자’란 의미를 지닌 스핑크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테베라는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여행자들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전설에 의하면 헤라 여신이 에티오피아에 있는 스핑크스를 그리스 테베로 보냈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질문한다. “어느 동물이 한 목소리를 지니면서도 네발로 걸었다가, 두발로 걷고, 그 후에 세발로 걷느냐?” 스핑크스는 대답하지 못하는 여행자의 목을 졸라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입니다. 갓난아이는 네발로 기어 다니고, 어른이 되어 두발로 걷고, 노인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 세발로 다닙니다.” 다른 여행자들이 스핑크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해답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사람”이라고 대답한 질문의 궁극적 해답은 ‘인간’ 즉 ‘나 자신’이다.
그리스 비극
그리스 비극은 스핑크스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시문명을 구축하고 공동체의 공동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통과의례를 치르도록 했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즈네프(van Gennep)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을 ‘통과의례’라고 명명했다. 이 의례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첫 번째는 ‘분리’, 두 번째는 ‘경계’, 마지막 세 번째는 ‘통합’이다.
아테네인들은 과거의 야만적인 문화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켜 서양문명의 모체가 되는 그리스문명을 배태시킬 참이다. 이 절체절명의 시간에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라는 비극적인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어떻게 괴물 스핑크스를 따돌렸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새로 구축한 도시문명의 상징인 테베에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왕)》를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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