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만 모르는 젊은 꼰대 스타일
옛날엔 고지식한 상사 욕하더니
카톡 업무 공지사항 다 봤는데 대답 안했다고 지적질
회식 땐 고기 구우라고 눈치 줘…여기가 군대인가요?
젊은 감성 맞나
친해지려 'OTL' 썼다는데 철 지난 유행어에 헛웃음만
[ 윤희은 기자 ] 대기업에 근무하는 최 과장은 최근 후배 직원들로부터 ‘젊꼰(젊은 꼰대)’이라는 타박을 받았다. 후배 직원들이 오전 9시에 딱 맞춰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지적한 것이 문제가 됐다. “출근 시간이 9시라는 것은 9시에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핀잔을 주는 최 과장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 직원들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6시 퇴근을 보장해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구느냐”는 동료의 지적에 최 과장은 괜히 억울했다.
힙합바지 주머니에 삐삐를 넣고 다니면서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따라 부르던 X세대들이 어느덧 직장 내 ‘고참’이 됐다. 아직은 스스로가 젊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지만 갓 입사한 20대 직원들의 시선은 다르다. 30~40대 초반의 나이에 ‘젊꼰’ 논란에 휩싸인 직장인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젊꼰’ 소리 들을까 전전긍긍
자동차 부품업체에 다니는 한 과장은 최근 팀 회식으로 고깃집에 갔다가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막내 직원이 완전히 손을 놓은 채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한소리 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막내가 먼저 수저도 놓고, 고기도 굽는 게 보기 좋다”며 타이르듯 얘기하는 한 과장에게 막내 직원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미지근한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았던 한 과장이 한마디 더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동료직원이 그를 제지했다. “그렇게 말 함부로 하다가 ‘젊꼰’ 된다.”
젊꼰 논란은 온라인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입사 5년 차인 김 대리는 부서 카카오톡 단체방을 언제나 주시한다. 부장이나 차장의 업무 지시에 항상 가장 먼저 ‘넵’,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다. 그러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1~2년 차 직원 중에선 대답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괘씸한 마음이 든 김 대리는 후배들에게 “부장이 지시를 하는데 대답이 없으면 안 된다”며 개인 카톡을 보냈다. 이어진 후배들의 반응은 김 대리를 허탈하게 했다. “확인한 것은 모두가 아는데, 왜 굳이 대답해야 하느냐”는 반문이 돌아온 것이다.
농담으로 한 말이 후배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X세대도 많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최 과장은 자신보다 5년 늦게 입사한 여자 후배 민 대리와 친밀하게 지내왔다. 사이가 틀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연애하고 싶어 고민”이라는 민 대리에게 “입을 자꾸 먹는 용도로만 쓰니 그렇지”라며 농담을 건넨 것이 화근이었다. 얼굴이 사색이 된 민 대리에게 최 과장은 바로 사과했다. 하지만 이후부터 관계가 예전과 달라졌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굉장히 어색해졌어요. 꼰대 되는 것도 한순간이더라고요.”
건설업체에 다니는 하 대리는 동기인 김 대리 때문에 고통이다. 김 대리의 남녀 차별적인 발언 때문에 여직원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아서다. 김 대리는 “여자는 똑똑해봐야 잘난 척만 하기 때문에 예쁜 게 최고다”, “여자들도 군대를 보내야 정신 차린다” 등의 농담 아닌 농담을 습관처럼 한다. 그러다 보니 “제발 김 대리 입 좀 어떻게 해달라”는 여직원들의 민원을 듣는 것이 하 대리의 비공식 업무가 됐다. “저도 같은 남자이지만 왜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 모르겠어요. 듣고 있으면 꼭 우리 아버지 세대와 대화하는 것 같다니까요.”
후배와 친해지려다 ‘무리수’ 지적만
젊은 직원들과 가까워지려다 ‘무리수’라는 지적을 듣는 경우도 있다. 전자부품 제조업체에서 근무하는 진 대리는 팀 카톡방에 ‘OTL(사람이 좌절해서 땅에 손을 짚고 엎드린 모습)’이라고 적었다가 신입 직원들로부터 비웃음만 샀다. 본인 나름대로는 센스있어 보이기 위해 시도한 것인데 “언제적 OTL입니까, 대리님”이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20대 중반 직원 중에서는 OTL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ASAP(as soon as possible) 같은 것 아닌가요”라며 천진하게 물어오는 후배직원을 보면서 진 대리는 스스로가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좌절했다.
콘텐츠 기업에 다니는 김 PD의 최근 고민은 ‘요즘 애들’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의 주요 업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바이럴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유행하는 동영상이나 온라인 콘텐츠를 보면서 나름대로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언젠가부터 특정 콘텐츠를 두고 대학생 인턴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며 ‘자문’을 구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프로젝트 뒤풀이 술자리에서는 20대 팀원들로부터 “PD들이 철 지난 콘텐츠만 선정해서 회의 때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어렵다”는 지적까지 들었다. “20대 감성과 제 감성에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오만이었나 봅니다.”
석유화학기업의 김 차장은 얼마 전 신입 직원들과 신촌에 갔다가 망신을 당했다. 90년대 학번인 그가 학창시절 자주 다니던 한 주점에 신입 직원들을 끌고 갔다가 “나이 제한이 있다”는 직원의 제지로 쫓겨난 것이다. 과거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먹기 위해 자주 들락거리던 해당 주점은 언젠가부터 클럽 형식으로 운영되는 ‘20대 헌팅명소’가 됐다. “대학생 때 자주 가던 곳이라면서 의기양양하게 들어갔는데, 나이 때문에 입장이 안 된다며 쫓겨나니까 엄청 서럽더라고요.”
선·후배 사이 낀 ‘샌드위치 신세’
모임을 최대한 줄이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꼰대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9년 차 직장인 김 과장은 어느 순간부터 후배와 업무 이외의 교류를 하지 않는다. 후배들로부터 “아직 젊은 선배가 벌써부터 부장처럼 군다”, “저 선배는 꽉 막힌 것 같다”는 뒷담화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 “차라리 선배들하고 지내는 게 낫더라고요. 전 윗사람들한테 조언 듣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요즘 20대 직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근무하는 이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업무상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만남을 자제한다. 어린 후배들에게는 자칫 자신이 꼰대처럼 비치는 것이 두렵고, 나이 많은 상사들에게는 잔소리 듣는 것이 싫어서다. 다행인 것은 근무 분위기가 자유로운 IT업계다 보니 이씨를 특별히 모난 사람으로 취급하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또래가 가장 편해요. 꼰대가 될 일도, 꼰대를 상대할 일도 없으니까요.”
직장 생활 10년 차인 김 과장은 부장과 후배 직원들 사이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어 지내는 생활에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다. 기러기아빠인 부장은 직원들 간 단합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종종 주말 등산 등의 일정을 잡는다. 김 과장은 상사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다지는 것도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해 가급적이면 참여하자는 주의다. 하지만 후배들의 생각은 다르다. “시간 외 수당을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반발하는 후배도 적지 않다. “줄기차게 부서 모임을 만들어대는 부장의 비위를 맞추고, 한쪽으로는 불만을 쏟아내는 후배를 달래느라 너무 힘드네요.”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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