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는 한양 도성을 쌓으면서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에 있는 사대문 이름은 유교의 ‘인·의·예·지’ 이념을 넣어 지었다. 동쪽은 흥인문(興仁門), 서쪽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은 숙정문(肅靖門)이라고 했다.
조선 초기부터 동대문으로 불린 흥인문은 고종 6년(1869) 개축공사 때 ‘갈 지(之)’자를 넣은 네 글자 이름으로 바뀌었다. 툭하면 물에 잠기는 이곳의 땅 기운을 북돋는다는 취지에서였다. 현판도 가로형에서 정사각형으로 교체했다.
여기에는 풍수지리학의 영향이 컸다. 남대문인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禮)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므로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로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다. 옹성은 성문 밖에 일정한 높이의 옹벽을 친 것을 말한다. 이 또한 저지대에 돌을 포개어 올려 양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건축 공사가 다른 곳보다 두 배나 힘들었다는 기록이 《태조실록》에 남아 있다.
이 문은 태종이 아버지 태조의 건원릉을 참배하기 위해 드나들던 곳이기도 하다. 임금의 장례 행렬이 이곳을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사연도 많다. 시인 권필은 광해군의 권세를 풍자한 시 때문에 미움을 샀다가 고문 끝에 이 문으로 나온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흥인지문이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은 1962년이다. 앞서 조선총독부는 문화재에 관리 번호를 매기면서 ‘조선 보물 1호 남대문, 2호 동대문’으로 정했다. 광복 후 이를 국보와 보물로 나누는 과정에서 숭례문은 국보 1호, 흥인지문은 보물 1호가 됐다. 이는 문화재 가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행정 편의상의 분류 번호일 뿐이다.
그러나 ‘1호’라는 상징성 때문에 두 곳 모두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 2008년 2월 숭례문 화재 때는 온 국민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제 새벽에는 흥인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다행히 불은 4분 만에 꺼졌지만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문화재는 단순한 건축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오랜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다. 그나마 ‘불’을 막으려고 세로 현판을 세운 숭례문에 비해 흥인지문은 ‘물’이 많은 곳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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