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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살인의 추억'과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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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회 <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장 jhlee0110@gmail.com >


1986년 경기 화성군 어느 마을. 성폭행 후 살해된 여성이 발견된다. 경찰이 고군분투하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그려낸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다.

같은 해 영국의 작은 마을. 여중생이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채 발견된다. 3년 전 동일 수법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경찰은 동네 불량배 리처드 버클랜드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경찰이 DNA 분석을 의뢰했는데, 놀랍게도 버클랜드의 DNA는 3년 전 사건은 물론 여중생으로부터 확보한 용의자 DNA와도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발칵 뒤집힌 경찰은 5000여 명의 마을 사람 DNA를 전수조사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진범을 찾아내 체포했다.

이 사건부터 시작된 DNA 감식은 어느새 과학수사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고도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DNA 감식도 현장에서 확보한 DNA와 비교할 대상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DNA 데이터베이스를 도입했다. 2010년 한국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관련 법률이 제정돼 운영을 시작했다.

DNA 데이터베이스에는 신원 확인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수록된다. 그 정보도 숫자와 기호로만 표시된다. 개인의 내밀한 유전 정보는 관리도, 분석도 하지 않는다. 채취 대상 범죄도 재범률이 높은 범죄 유형으로 제한해 연 3만 건 내외, 인구 대비 0.06% 수준으로 미국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국가가 DNA 채취로 개인의 유전자 정보를 통제, 감시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현행법에 따라 11개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만 DNA를 채취하지만, 그 범위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많다. 개인 사생활과 신체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국가의 DNA 채취와 관리에는 사회구성원의 충분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다만, 빠른 범인 검거를 통해 사회를 보호하고 무고한 용의자의 누명을 밝혀주는 데 DNA 수사가 갈수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DNA 수사로 2015년 ‘창원 무학산 살인사건’에서 구속 위기에 놓였던 용의자가 누명을 벗은 적이 있다. 데이터베이스 운영 이후 영구미제로 묻힐 뻔한 5000여 개 사건을 재수사해 수많은 진범이 처벌을 받았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지금과 같은 시스템만 있었다면 결론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DNA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막연한 오해를 거두고 흉악한 범죄로부터 사회를 지키고 인권을 보호하는 장치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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