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역사상 44년 만에 연임
정치색 없는 통화정책 전문가
김동연 부총리 취임후 5차례 회동
통화스와프 등 공조 돋보여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 무난할 듯
"연임은 중앙은행 역할 인정받은 것
4년 전보다 무거운 책임감 느껴"
이주열호 2기 과제는
한-미간 금리역전·가계빚 등
국내외 환경 녹록지 않아
5월 금리 인상설 급부상
[ 김은정 기자 ]
한국은행에서 44년 만에 연임 총재가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이주열 한은 총재(66)를 차기 총재로 다시 지명하면서다. 총재 연임 사례는 1974년 김성환 전 한은 총재 이후 없다. 한은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아 사실상 정부로부터 독립한 1998년 이후엔 처음이다.
청와대 “통화정책 안정성 중요”
이 총재의 연임 결정은 거시경제를 안정적으로 끌고 가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을 비롯해 선진 각국이 과거 양적완화 정책의 정상화에 속도를 내는 등 글로벌 통화정책이 변곡점에 있어 정교한 정책적 대응이 요구되는 만큼 통화정책의 연속성에 무게를 뒀다는 의미다. 청와대 관계자도 “주요 선진국에서 중앙은행 총재가 오래 재임하면서 안정적인 통화정책을 펴고 있는 점을 참고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임기 초반 ‘매파’(통화긴축 선호)적인 성향이 부각됐지만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등을 겪으며 다섯 차례 금리를 내렸다. 일각에선 좌측 깜빡이를 켜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경기회복을 지원하며 4년간 무난하게 거시경제 상황을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통화스와프를 통해 외환안전망을 탄탄하게 짠 점은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이 총재는 지난해 10월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을 딛고 진통 끝에 한·중 통화스와프 연장 합의를 이끌어낸 데 이어 지난해 말에는 캐나다와 무제한·무기한 통화스와프를 체결했다. 지난달에는 스위스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를 맺기도 했다.
“한은 중립성 보장 의지”
이 총재 연임에는 통화정책의 중립성을 중시하는 선진국에서 중앙은행 총재의 연임이 보편화하고 있는 흐름도 영향을 미쳤다. 청와대 관계자도 “한은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다”고 전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앙은행 총재 임기는 길게는 8년까지 보장돼 있고, 10년 이상 재임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재닛 옐런 전 Fed 의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연임하거나 장수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국 중앙은행(BOE) 총재 임기는 8년이며, BOE는 연임이 가능하다. 저우샤오촨 중국인민은행장은 2002년부터 16년째 재임하고 있으며, 최근 일본 정부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연임을 결정했다.
이 총재도 이날 연임 결정 발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4년 전 총재 지명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중앙은행의 중립성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박근혜 정부 때 발탁됐지만 정치색이 없는 통화정책 전문가로 통한다. 전 정부에서 임명됐음에도 오히려 현 정부 경제팀과 호흡이 잘 맞는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청문회 통과도 고려 대상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문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연임 결정에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2013년 한은법 개정에 따라 한은 총재도 인사청문회 대상에 포함됐는데, 이번에 강화된 인사청문회 기준이 처음 적용된다. 청와대는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 검증과 관련해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의 기존 5대 인사원칙(병역 기피, 세금 탈루, 불법적 재산 증식, 위장전입, 연구 부정행위 등 불가)에다 음주운전과 성 관련 범죄를 추가해 7대 원칙을 세웠다.
이번에 이 총재와 함께 유력하게 거론됐던 학자와 한은 출신 ‘OB(올드보이)’들도 한층 까다로워진 인사 검증 기준에 걸려 대부분 중도 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관료들은 한은 독립성 원칙에 따라 막판에 후보군에서 배제됐다.
기준금리 인상 딜레마
이 총재의 연임 2기 체제 여건은 녹록지 않다. 국내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기준금리 딜레마’에 놓여 있다. Fed가 당장 오는 21일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커졌다. 현재 기준금리는 한국이 연 1.50%, 미국이 연 1.25~1.50%다. 미국이 이달 기준금리를 올리면 한·미 간 금리가 역전된다. 한은도 기준금리 인상을 서둘러야 하는 시점이지만 국내 경기 회복세가 충분히 강하지 못한 데다 일자리 증가가 미미한 게 변수다.
여기에 미국의 통상압박까지 더해지면서 수출 경기도 불투명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 말 6년5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 한은은 1월에 이어 지난달에도 연 1.50%인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145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의 소프트랜딩(연착륙)도 이 총재가 풀어야 할 과제다.
채권시장에서는 이 총재 연임에 따라 5월 금리인상설이 급부상하고 있다. 신임 총재 적응기간이 필요 없는 만큼 이 총재가 예상보다 공격적으로 금리인상에 나설 것이란 관측에서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통위는 3월에는 건너뛰고, 4월12일에 이어 5월24일에 열린다. 다만 경기회복 속도가 예상대로 진행되는지, 금리인상 부담요인인 저물가 상태가 해소되는지 여부 등이 변수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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