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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 제대로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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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서 한물간 권투선수로 코믹 연기 도전
트레이닝복에 슬리퍼는 기본, 브레이크 댄스에 허세까지 가득
무거운 이미지 벗고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로 컴백



“연기는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오래 연기를 해도 새 작품을 만나면 여전히 부담스럽고 긴장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발전하고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는 17일 개봉하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한물간 권투선수 역으로 현실감 넘치는 코믹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이병헌(48)의 말이다. 그는 “많은 작품을 했어도 형태와 종류가 다를 뿐이지 고민의 크기는 늘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주먹만 믿고 살아온 전직 복서 조하(이병헌 분)와 서번트증후군을 앓으며 엄마만 믿고 살아온 동생 진태(박정민 분)가 난생처음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병헌이 연기한 조하는 한때 동양챔피언까지 올랐지만 지금은 가진 것 없이 스파링 파트너, 전단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이다. 떨어져 살던 엄마 인숙(윤여정 분)을 우연히 만나 그의 집에 머물면서 처음 만난 동생과 동고동락한다.

“조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쓸쓸한 인물이죠. 하지만 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슴 깊은 곳에 트라우마가 있겠지만 겉으론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진 인물이라고 생각했죠.”

이병헌은 한없이 망가진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 스타일에 트레이닝복과 슬리퍼 차림은 기본이다. 허세를 부리다 링 위에서 KO패를 당하고, 여고생과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불리할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욕을 내뱉는 모습마저 웃긴다. 이병헌은 감독, 배우들과 의견을 모아가며 더 재미있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고 했다. 애드리브로 탄생한 장면도 많다.

“웃기는 게 재미있어요. 시나리오를 보고 연구해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욕심이 과하면 선을 넘길 수가 있죠. 많은 관객이 용납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선을 찾으려고 고민했습니다.”

1991년 KBS 14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병헌은 그간 쉼 없이 작품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출연작)를 다양하게 채워왔다. 최근에는 장르 색채가 짙은 ‘내부자들’(2015) ‘마스터’(2016) ‘남한산성’(2017) 등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런 그가 무거운 이미지를 벗고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로 돌아왔다는 점은 ‘그것만이 내 세상’의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극단적 상황에 놓인 캐릭터를 연기할 땐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자신감이 떨어지죠. 반면 이번 영화에서처럼 현실에 있을 법한 캐릭터를 연기할 땐 자신감이 생겨요.”

이병헌은 후배 박정민과 형제로 호흡을 맞췄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양보 없는 열연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박정민 얘기를 꺼내자 이병헌은 “정말 좋은 배우가 나왔다”고 반색했다.

“영화는 한 사람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맡은 바를 잘해내야 시너지가 생기죠. 이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신인이 맡는다면 선배로선 걱정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민이가 연기하는 걸 보고 걱정이 사라졌어요. 후배나 신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죠.”

천재 성향을 보이는 서번트증후군 이야기는 국내외 영화에서 많이 사용됐던 소재다. 개성 강한 가족 구성원이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가족애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진부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병헌은 이야기의 힘을 믿었다고 했다.

“영화엔 ‘코드’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들의 어떤 이야기가 ‘코드’ 안에 녹아드는지가 중요하죠. 웃음과 슬픔이 공존하는 이야기가 계속 사랑받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감동의 색깔과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은 관객에게 좋은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병헌은 ‘그것만이 내 세상’을 통해 연기에 변주를 시도했다. 올해 하반기 방영 예정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출연도 확정했다. 2009년 KBS2 ‘아이리스’ 이후 9년 만의 드라마 출연이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뭘까.

“타성에 젖는 순간 새로운 걸 못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필모그래피를 채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작품을 선택하기보다는 제 마음을 움직이는 시나리오의 힘을 믿습니다. 편견이 들어가면 좋은 작품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백지상태로 시나리오를 읽으며 좋은 작품을 찾으려고 합니다.”

현지민 한경텐아시아 기자 hhyun41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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