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눈 경계선이 하필이면 왜 북위 38도선이었을까. 가장 많이 알려진 얘기는 미국 영관급 장교들이 벽걸이 지도를 보고 즉흥적으로 결정했다는 설(說)이다. 현장에 있었던 한 장교는 훗날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다”며 아쉬워했다. 그의 목격담을 들어보자.
일본의 항복을 앞둔 1945년 8월, 조지 마셜 장군은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반도를 분할 관리하는 방안을 보고하라고 에이브 링컨 장군에게 지시했다. 링컨은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평양 바로 아래의 39도선을 경계로 분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이어서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군사분계선을 지킬 수 있다는 게 근거였다.
그러나 링컨은 38도선을 따라 선을 그었다. 다른 장교들이 왜 1도 내려야 하는지 묻자 “니컬러스 스파이크만 때문이지”라고 답했다. 스파이크만은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로 강의 때마다 세계적인 문학과 발명품의 90%가 38선 북쪽에서 창조되고, 위대한 인물들도 거기서 났다고 강조한 지정학자다. 링컨은 그를 언급하며 38선을 밀어붙였다.
반대하던 참모들은 링컨의 기세에 밀려 마셜 장군에게 39선 의견을 보고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장교들이 벽에 걸린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뒤 분할 점령안을 보고했고, 이것이 대통령에게 보고돼 맥아더 사령관에게 하달됐다고 알려져 왔다.
당시 이 상황을 지켜봤던 장교의 이름은 에드워드 라우니. 예비역 중장인 그는 2014년 출간한 회고록 《운명의 1도(원제 An American Soldier’s SAGA of the Korean War)》에서 “39선이라면 방어가 더 쉬웠고 6·25 때 많은 미군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번역본 제목도 분계선이 39도로 정해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취지로 정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도쿄의 미 극동사령부 참모 시절 일요 당직 장교로 북한의 남침을 맥아더에게 최초로 보고했고,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3인방의 한 사람이었다. 군인과 민간인 20여만 명을 구한 흥남철수 때도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켰다.
3년 전 출판기념차 방한 때 하모니카로 ‘아리랑’을 연주해 큰 박수를 받았던 그가 지난 1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생전에 그는 “한국인이 모르는 6·25 비사(秘史)들을 알리고 싶다”며 “한국의 오늘이 수많은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점을 젊은이들은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1세기에 걸친 그의 삶은 지금도 우리 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폴란드계 이민자인 그가 모국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치려고 장학재단을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더욱 숙연해진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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