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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미국 없는 WTO, 한국은 준비돼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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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다자통상체제를 등지겠다는 미국
힘 앞세운 중국의 부상과 보호주의 우려
경제 패러다임 혁신으로 통상갈등 대비를

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통상학회장 byc@ewha.ac.kr >



164개 회원국을 거느린 ‘통상의 유엔’ 격인 세계무역기구(WTO)가 식물화(植物化) 위기에 직면했다. 지난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WTO 통상장관회의는 미국의 반대 탓에 공동선언문조차 없이 끝났다. 이 회의에서 미국은 WTO 분쟁 해결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날을 세웠다. 비슷한 시간, 한국국제교류재단과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주최로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포럼에서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은 “미국은 양자주의를 추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실상 WTO를 떠나겠다고 한 셈이다.

회원국 간 합의한 규칙만 지킨다면 해당 국가의 능력에 따라 수출 규모가 좌우되는 다자통상체제는 무역지향 성장전략을 추구하기로 작정한 빈곤 개발도상국들에 주어진 복음이었다. 다자통상체제는 1960년대 일본의 산업화, 1970년대 한국 및 대만의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고 이들이 전근대적 권위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로 변신하는 데 기여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노선으로 선회한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 역시 다자무역체제 속에서 가능했다. 2001년 시작된 무역자유화 협상인 도하 라운드를 끝내지 못한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WTO를 통한 분쟁 해결은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이젠 그 분쟁 해결 기능마저 마비될 듯하다.

충격적인 것은 ‘WTO 식물화’를 주도하는 국가가 WTO 설계자인 미국이란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자유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이 옛 소련과의 냉전구도 속에서 세계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으로 다자무역체제를 설계했다. 미국은 설계자인 동시에 다자체제의 최대주주였다. 국내에서의 보호주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다자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물줄기를 잡아오던 미국이 이제 역사책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분쟁 해결 장(場)으로서의 WTO의 무력화 조짐은 수년 전부터 있어 왔다. 미국은 WTO 분쟁상소기구가 “WTO 협정을 해석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낸다”고 불만을 표출해 왔다. 그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에 비우호적인 상소위원의 연임 거부, 공석인 상소위원직의 신규 선임 지연 등 WTO 분쟁 해결 기능의 무력화를 시도해 왔다. WTO 분쟁조정 절차에 가장 많이 회부되는 미국이 판정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다면 상대국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통상보복뿐이다. 하지만 통상보복은 분풀이에 불과하지 분쟁을 해소하는 해법이 아니다. 판정 불복과 통상보복이 이어진다면 보호주의 장벽이 여기저기에 세워질 것이고 WTO 체제에 대한 신뢰도는 갈수록 약해질 것이다. 나라마다 경쟁적으로 보호주의 장벽을 쌓던 1930년대의 통상 갈등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WTO의 식물화는 ‘무역 태풍’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에 심각성이 있다. 미국이 떠난 무대에 등장할 중국은 스스로를 자유무역체제 신봉자인 것처럼 장광설을 쏟아내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호주의 대응에 무력한 WTO 아래에서 제2, 제3의 사드 보복 사태가 발생할 때 취할 수 있는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이런 선택지를 알고 있는 중국이 거칠게 통상압박을 해올 때 한국은 어떻게 맞설 것인가. WTO 제소 카드를 가지고 있는 이번 사드 보복 사태에서도 우유부단했던 한국 정부를 기업들은 믿고 투자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4차 산업혁명을 핵심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막대한 보조금, 국유기업에 일감 몰아주기, 중국에 투자한 외국 기업 따돌리기, 교묘한 형태의 비관세장벽 세우기 등 WTO 체제에서는 용인되지 않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상황이다. 특히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본격화된다면 한국의 주력 수출전선은 물론 한국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식물화된 WTO에는 중국의 질주를 막을 브레이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제2의 사드 사태가 터진다면 그 충격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기업 중심 수출주도형 경제를 비난만 할 뿐 보완할 장치는 마련하지 못한 채 핵심 제조업에서 중국에 추월당한다면 한국은 중국 눈치만 보고 살아야 했던 시절로 퇴보할지도 모른다.

최병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통상학회장 byc@ewha.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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