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담한 '한국 공대'
필수과목 수강생도 3분의1로
학생들 학점 잘주는 과목만 찾아
"연구·실험 위주로 커리큘럼 바꿔야"
정책 결정에 배제된 과학계
4차 산업혁명·탈원전 등 비전문가 집단이 정책 결정
"정부 신산업 규제 없애고 과학계 모여 정책 큰그림 그려야"
[ 박근태 기자 ]
“정부가 나서 규제를 과감히 없애면서 변화에 대처하는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국은 점점 역동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이러다간 한국이 잘하던 산업 분야마저도 다른 나라에 주도권을 넘겨줘야 할 판입니다. 정부와 산업계, 교육계가 모여 한국의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학교수)이 이달 말로 취임 1년을 맞는다. 권 회장은 지난해 12월 국내 산업계와 공학계 전문가의 대표 단체인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산업계와 산학 연구를 가장 활발히 펼치는 반도체·디스플레이 분야의 석학이다. 그의 사무실이 있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 정보통신관 12층에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SK하이닉스 등과 산학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실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다. 영업 비밀을 생명으로 여기는 기업들이 얼마나 그를 신뢰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 회장은 “일본은 지난 10월 교토에서 열린 과학기술과 사회(STS)포럼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나서 자율주행차와 줄기세포 연구 규제를 완전히 풀겠다며 신산업 지원에 나섰다”며 “한국은 그처럼 빠르게 대응한다는 느낌을 국민에게 주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 나라의 산업이 역동성을 유지하려면 대학이 그만한 인력을 배출해야 하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이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 회장은 “한국의 부모와 학생의 인생 목표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에서 끝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어떤 면에서 대학의 역동성이 사라진다고 보십니까.
“요즘 학생들은 전공 학문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시험만 잘 보는 걸 선호합니다. 4~5년 전만 해도 수업시간에 한두 명이 졸았는데 이제는 수업 듣는 학생 중 10% 정도는 잡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에 다니는 습성이 몸에 배다 보니 학교 수업을 학원 수업처럼 듣는 겁니다. 전공필수 과목을 듣는 학생이 3분의 1로 줄고 심지어 폐강도 됩니다. 대학원을 오겠다는 학생들을 상담해보면 전자공학을 전공했다고 믿어지지 않는 졸업생들이 많습니다.”
▷현재의 공대 교육에는 어떤 문제가 있나요.
“엔지니어는 융합적인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학에선 전문적인 전공 지식을 더 집중적으로 쌓아야 한다고 봅니다. 실험에 바탕을 둔 전공 지식 말입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초·중·고에 다닐 때 전인 교육을 하는 게 맞습니다. 전공이 약해지면서 대학원 연구 품질은 많이 추락했습니다. 1990년대만 해도 저희 연구실에선 연간 70억원 규모의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대학원생 한 명당 3억원 규모 과제를 수행했는데 이제는 1억원 과제에 2~3명이 붙어야 합니다.”
▷학생들에게서 왜 그런 문제가 나타난다고 보는지요.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에게서 흥미를 빼앗아간 것이 큰 이유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원 교육이 습관화된 세대는 막상 대학에 오면 하고 싶은 게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판단할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공대 대학원 학생 가운데에도 연구를 계속하지 않고 ‘셰프를 하겠다’ ‘대기업에서 적은 돈 받고 일하느니 학원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심지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로를 결정할 때도 어머니가 문의를 해오는 일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정부 지원이 청년 창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보십니까.
“한양대만 해도 꽤 많은 학생이 창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정부 정책이 활기를 불어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단계에 있는 청년 창업가에게 지원되는 엔젤펀드는 한국에 없습니다. 아이디어가 넘치는 청년 창업자 중 상당수가 결국 투자자를 찾지 못하고 금방 ‘번아웃(소진)’돼 버리고 맙니다. 초기 창업 지원에 신경쓰지 않으면 청년 창업의 역동성도 사라질 겁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새로운 경제 슬로건을 내놓고 있습니다.
“정부나 정치권이 먼저 슬로건을 정하고 정책을 끌고 가는 건 너무 낡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한국도 이제 상당 분야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 역할을 하는데 톱다운(하향식) 정책을 펴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전문가에게 의견을 수렴한다고는 하나 너무 형식적입니다. 이메일을 산업계와 학계에 뿌리고 돌아오는 메일만 보고 의견을 수렴했다고 합니다.”
▷산업계와 학계가 역동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부가 배려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요.
“기업이 연구개발(R&D)에 재투자할 여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여 걱정스럽습니다. 요즘 통신료 인하와 관련해 많은 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싸게 통신서비스를 쓰면 좋은 일입니다. 다만 5세대(5G) 이동통신 이후 차세대 통신 기술 연구에 필요한 돈이 많이 들어갈 게 뻔히 보이지만 이에 대한 계획은 없어 보입니다. 돈을 벌어 R&D에 재투자하는 기업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은 4차 산업혁명 정책 추진 과정에서 허둥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산업을 골고루 발전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정부와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정부나 산업계나 미래 어떤 산업을 육성해야 할지, 어떤 시장을 만들어야 할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계와 산업계, 교육계, 보건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바이오 분야는 유망하다고 봅니다. 정부는 신산업 창출을 막는 규제를 과감히 없애고, 산업계와 공학계는 국민과 소통을 강화해 미래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믿음을 줘야 합니다.”
■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1955년 경남 고성 출생
△한양대 전자공학과 졸업
△미국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석사, 박사
△1980년 금성전기 기술연구소 입사
△1987~1992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사 반도체프로세스디자인센터 책임연구원
△1992년~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2008~2011년 한양대 공과대학장
△2010~2011년 한국정보디스플레이학회장
△2011년~2013년 한양대 교학부총장
△2017년~ 한국공학한림원 회장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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