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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 나라 살리려 창업 도전… 산학협력 통해 청년들에 희망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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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창업 교수' 박희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 임근호 기자 ] 주가는 폭락하고 기업 도산이 줄을 이었다. 1997년 11월21일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신청했다. 국민이 나라를 살리겠다며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선 그해 겨울 서울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박희재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나라를 구하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박 교수는 1998년 2월 대학원생 5명과 디스플레이 장비업체 에스엔유프리시젼(SNU Precision)을 세웠다. 수출로 달러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내가 진짜 실력 있는 엔지니어라면 시장에서 진검 승부를 펼쳐 1달러라도 수입을 대체하고, 1달러라도 수출하자”고 결심했다. 그의 도전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올 1월까지 대표이사를 맡았던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지난해 매출 579억원 가운데 83%인 478억원을 수출로 올렸다. 2005년 코스닥시장에 상장했고, 2014년에는 ‘7000만불(弗) 수출탑’을 받았다.

박 교수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해 5월부터 청년희망재단 이사장을 맡아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에 나섰다. 서울 신림동 서울대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박 교수는 “청년들은 취업이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중소기업은 뽑고 싶은 사람을 못 뽑는 ‘미스매칭’이 이어지고 있다”며 “중소기업과 대학, 정부 출연연구소가 함께 참여하는 산학연 프로젝트를 통해 ‘중소기업 경쟁력 향상’과 ‘청년 취업난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라고 했다.

산학 협력으로 중소기업 경쟁력 높여야

“우리나라 전체 일자리 가운데 88%가 중소기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중소기업의 83%는 단 1달러도 수출을 안 해본 곳이에요. 대부분 영세하고 기술이라고 할 게 없습니다. 일자리 창출과 국가 경쟁력 향상은 결국 경제의 허리인 중소기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데, 허리에서 막힌 부분을 무엇이 뚫어줄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이라고 봅니다.”

박 교수는 1987년 박사학위를 따러 영국 맨체스터공대로 유학 갔을 때 이를 배웠다고 했다. 그곳에선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당신의 연구가 관련 산업에 어떤 공헌을 했느냐’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주말이면 지도교수와 함께 연구한 기술을 갖고 영국 회사들을 찾아다녔어요. 내 이름은 뭐고, 이런 기술을 갖고 있는데, 당신 회사에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3분 안에 어필해야 했죠. 그러려면 자기 기술만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기업 현장에서 애로사항이 무엇인지, 기존 기술에 내 기술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등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퇴짜 끝에 그가 개발한 제품 정밀도 측정 기술은 영국 어느 기업에 이전돼 기술료도 받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청년희망재단을 통해 산학 협력 모델을 구체화하고 있다. 지역 테크노파크 세 곳과 선문대가 참여한 ‘산학 협력 청년 일자리 플랫폼 사업’이 그중 하나다. 평소 산학 협력을 활발히 하는 교수 30여 명이 기업과 함께 학생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면서 지금까지 120여 명의 학생이 취업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는 ‘온리원 열린채용’ 제도도 도입했다. 박 교수는 “청년들이 이력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 목숨을 걸지만 정작 기업에선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며 “재단에서 우수 중견·중소기업을 하루에 하나씩 선정해 모든 지원자에게 면접 기회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술 먹고 청와대에 팩스 보내

박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포항공대(현 포스텍) 산업공학과 조교수를 거쳐 1993년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됐다. 영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1년에 10건씩 산학 협력 프로젝트를 했다. “한국에서 나와 산학 협력을 안 해본 기업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프로젝트를 많이 했어요. 좋은 특허도 많이 갖고 있었죠. 그래서 창업에도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1998년 그가 회사를 세우려 했을 때 의외의 곳에서 난관이 나타났다. 서울 관악세무서에 사업자등록을 하러 갔을 때였다. ‘관악구 신림동 56-1 301동’으로 적힌 사업장 주소를 보고 세무서 직원이 퇴짜를 놓은 것이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서울대 교수는 교육공무원이라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영리 목적으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기업을 세우는 것도, 경영진으로 참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두 번째 문제는 장소였다. “신림동 56-1 301동은 서울대 신공학관입니다. 지금 이 교수연구실이 있는 곳이죠. 건물 용도가 교육연구시설이라 기업이 주소를 등록할 수 없다며, 서울대 밖 근린상가에 등록하라고 했어요.”

그는 건물 소유주인 교육부에 전화를 걸었다. 용도를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당연히 ‘안 된다’였다. 그는 생각했다. ‘법을 바꿔야겠어. 그런데 (서울대) 총장님이 법을 바꿀 수 있나? 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에게 얘기해야겠다.’ 소주 두 병을 마시고 A4용지 4장에 글을 적어 내려갔다. ‘첫째, 대학교수도 창업하게 해주십시오’ ‘둘째, 대학에 공장 등록이나 사업 등록을 할 수 없는데 이를 풀어주십시오’ 등을 적어 팩스를 보냈다. 수신은 청와대, 참조는 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였다.

다음날 새벽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대 총장이었다. “박 교수, 내 허락도 없이 어디다 뭘 보냈어?” “네, 보냈습니다.” “다음부턴 얘기하고 보내게.”

“청와대로 팩스를 보냈어도 법을 바꾸는 데는 1년 반이 걸렸습니다. 총리실, 교육부, 산업부, 국회 등을 계속 들락거려야 했어요. 그동안엔 일단 학생을 대표이사로 세워놓고 법인을 세웠는데, 제대로 사업은 못 하고 연구개발(R&D)만 해야 했죠.”

2000년 초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개정됐다. 대학교수와 연구원이 퇴직하지 않고도 창업할 수 있다는 문구가 한 줄 들어갔다. 또 실험실과 연구실에서도 제조업이 가능한 것으로 인정받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제조 벤처를 할 수 있게 됐다.

그제야 에스엔유프리시젼은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첫 제품은 공작기계 정밀도를 측정하는 볼 센서였다. 첫 수출도 곧 이뤄졌다. 상대는 스웨덴 자동차 부품회사 샤머텍. 수출 대금 약 1만5000달러가 농협은행 서울대 지점에 입금됐다. 박 교수는 “그때 은행에서 출금한 1달러 지폐는 내 보물 1호”라며 “상장처럼 장식해 고이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계급장 떼고 진검 승부해야

박 교수는 ‘진검 승부’란 말을 자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도전정신’이란다. 그는 규제만 푼다고 대학에서 창업이 활성화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대학에 있을 때야 ‘교수님’ 하고 대우해주죠. 시장에 나간 순간 한낱 납품업자에 불과해요. 계급장 떼고 오로지 실력으로 진검 승부를 벌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볼 센서 시장은 너무 작았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2001년까지 적자였다. LCD(액정표시장치) 장비 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박 교수와 제자들은 밤낮없이 연구해 2002년 세계 최초로 ‘비접촉식 3차원 나노형상 측정장비(PSIS)’를 내놓았다. 문제는 어떻게 해외시장에 파느냐였다. 좋은 장비를 개발하면 금방 팔릴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LCD 전시회에 이 장비를 출품해보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세계 1위 디스플레이 제조 강국이었다. 그런데 장비 무게가 100㎏이 넘었다. 비행기에 실어 보내려 견적을 뽑아보니 왕복 200만엔(당시 약 2000만원)이 나왔다. 그는 “창업할 때 3000만원 대출받고, 주변에서 2000만원 빌려 회사 자본금이 5000만원이었다”며 “제품 개발에 1000만원이 들었는데, 운송비로 2000만원을 쓸 순 없었다”고 했다.

꾀를 냈다. 장비를 분해해 박 교수와 대학원생인 직원 세 명이 나눠 가져가기로 한 것. 3~4주는 일본에서 머물러야 했지만 수화물 무게 한도를 넘기지 않으려 옷과 속옷도 거의 챙겨가지 않았다.

전시회에서 장비는 호평받았다. 박 교수는 무거운 장비를 다시 싸 들고 돌아가기 싫었다. 어떻게든 팔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현장에서 영업에 나섰다. “한 업체가 관심을 보였는데, 실무자가 부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며칠 기다려 부장을 만났더니 이번에 사장 결재가 필요하다고 해요. 결국 부사장을 만나 조건부로 결재를 받았죠. 그 이후로도 어찌나 깐깐하던지 이메일을 600개 넘게 주고받고, 미팅을 30차례 넘게 했어요. 하지만 한 번 인정받고 나니 입소문이 났죠. 일본 소니, 샤프, 히타치, 마쓰시타가 우리 장비를 썼습니다.”

에스엔유프리시젼은 이후 대만과 중국 시장에도 진출했고,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장비로 품목을 넓혔다. 박 교수가 회사를 경영하며 중시한 것은 ‘신뢰’였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공장이 멈춰 일본 디스플레이 업체들에 비상이 걸렸을 때, 주저하지 않고 엔지니어를 보내 장비를 수리했다. 방사능 공포가 컸을 때라 젊은 직원 대신 부장급 직원이 갔다.

외환위기 후 20년이 지났다. 그때보다 교수들의 창업 환경이 나아졌을까. 박 교수는 “옛날보다는 좋아졌지만 논문에만 몰두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했다. 대학은 논문 실적으로 교수를 평가하고, 정부의 R&D 지원 사업도 논문만 내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가 2013년부터 4년간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장을 맡으면서 가장 공을 들인 일도 산업부의 R&D 사업 평가 기준을 논문 수에서 매출과 고용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이공계 박사의 80%가 대학과 정부 출연연구소에 있습니다. 이들이 논문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사업화가 가능한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준다면 한국이 또 한 차례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 한국의 대표 교수 창업은…
메디톡스·씨젠·메디포스트… 대학 떠난 교수들 '바이오 돌풍' 주역

최근 ‘바이오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코스닥 상장사 중에는 교수 창업 기업이 많다. 코스닥 시가총액 7위 메디톡스는 KAIST에서 분자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선문대 교수로 있던 정현호 대표가 2000년 세웠다. 외환위기로 1998년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끊기자 창업에 나섰다. 코스닥 시가총액 8위 바이로메드는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1996년, 시가총액 32위 제넥신은 성영철 포스텍 생명과학과 교수가 1999년 창업했다.

기술력에 기반을 둔 교수 창업은 아이디어만 갖고 시작하는 대학생 창업보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크다. 그러나 제2차 창업 붐이 불고 있는 요즘 교수 창업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교수 창업 기업 상당수는 1차 창업 붐이 불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설립됐다. 코스닥 시가총액 42위 씨젠은 이화여대 생물학과 교수이던 천종윤 대표가 2000년 세웠고, 시가총액 52위 메디포스트도 성균관대 의대 임상병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양윤선 대표가 2000년 창업했다. 코스닥시장 상장을 준비하는 교수 창업 기업인 툴젠과 다이노나 역시 1999년 설립됐다.

교수들의 기업가정신 부재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교수 창업을 저해하는 환경도 문제다. 서울대는 교수들의 기업 활동 시간을 연구·교육 활동 시간의 5분의 1로 제한하고 있다.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창업했다가 복직한 교원은 3년이 지나야 재창업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진 대형 병원들도 의료기술회사 창업이 막혀 있다. 비영리 의료재단의 의료기술 사업화를 막는 규제 때문이다. 소속 교수들은 개인 자격으로만 회사를 차릴 수 있어 창업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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