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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은 '사소한 집안싸움'이다?…뿌리 깊은 차별과 30년을 싸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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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회 아산상' 수상한 한국여성의전화 고미경 대표

여성인권운동가 한길
총여학생회 통해 여성인권 관심
차별·폭력 남의 일 아니다 생각
"부산여성회 설립 기틀 닦았죠"

아직 갈 길 먼 여성인권
초창기 피해자 피신시켰다가 거꾸로
"인신매매 아니냐" 들어
가해자 찾아와 난동·욕설도 일상

"한국선 가정폭력의 1%만 신고
쉬쉬하지말고 도움 요청하세요"

쉼터에서 '자립터'로 변화
피해 여성의 경제적 자립 없으면
결국 폭력가정으로 다시 돌아가
피해자들의 '다음의 삶' 고민
"현장 목소리 내는 단체 될 것"



[ 구은서 기자 ] “가정폭력 피해자를 ‘쉼터’로 피신시켰다가 ‘인신매매범’이란 소리까지 들었죠.”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를 이끌고 있는 고미경 대표(50)는 1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983년 출범한 여성인권운동 단체로 가정폭력·성폭력 전문 상담 서비스와 피해 여성을 위한 임시 거처인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24일 제29회 아산상 대상을 받았다. 아산상은 고(故) 정주영 아산재단 설립자의 뜻에 따라 1989년부터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했거나 효행을 실천한 개인·단체를 선정해 수여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초창기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는 속설로 대변되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문화에 정면으로 맞섰다. 가정폭력이란 개념조차 없어 피해자 상담과 지원 활동을 하려면 “왜 남의 집안일에 끼어드느냐”는 삿대질과 욕설을 감수해야 했다. 고 대표는 “한국여성의전화의 역사는 우리 사회를 향해 ‘가정폭력·성폭력은 사소한 집안일이나 농담이 아니다’고 힘겹게 설득해온 여정”이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부터 여성인권운동 ‘한 우물’

고 대표에게 “큰 상을 받아 뿌듯하겠다”는 덕담을 건네자 그는 “뿌듯하다기보다 30여 년간 선배와 동료들이 이어온 활동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 같다”고 답했다. 고 대표는 답변할 때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쉼터를 보호시설이라고 설명하는 건 피해자의 자립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는 식으로 표현 하나하나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오랜 기간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워온 덕에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다.

고 대표는 여성인권운동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동아대 재학 시절 총여학생회 활동을 했고 졸업한 뒤 부산여성회 창립주비위원회에 참가해 기틀을 닦았다. 2002년 한국여성의전화에 합류한 뒤 사무처장, 가정폭력상담소장, 성폭력상담소장 등을 거쳐 2015년 상임대표에 올랐다.

여성인권운동에 뛰어든 이유를 묻자 고 대표는 “여성인권운동가가 되는 데 특별한 계기는 필요하지 않았다”며 “가부장제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 살면서 차별이나 폭력이 완전히 ‘남의 일’일 수 있는 여성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부산의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는 평범한 가정’에서 첫째 딸로 태어났다. 자신과 여동생에게는 항상 “나서지 마라. 몸가짐을 조심하라”며 잔소리하다 남동생에게는 “뭐든 해보라”고 가르치는 어머니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라고 느꼈다. 고 대표는 “자라면서 ‘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지’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 적지 않았고 그 답을 찾다보니 자연스레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하게 됐다”고 했다. 어머니도 이제는 한국여성의전화 회원으로서 고 대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고 대표는 “대표직을 맡기 전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어머니께 털어놓은 적이 있다”며 “거꾸로 어머니가 ‘네가 이제껏 한 우물을 팠는데 못할 이유가 뭐냐’고 역정을 내셨다”고 웃었다.

‘한때 내 머릿속에 페미니스트는 특정한 부류의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이며 인간적으로 완벽하고 남자를 증오하고 유머가 없는 사람들. 이런 신화에 속았다.’

미국 퍼듀대 영문학과 교수이자 작가인 록산 게이가 쓴 나쁜 페미니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다. 고 대표는 “‘성차별에 반대하느냐 아니냐’는 명제 외에 페미니스트를 구별하는 잣대가 따로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피해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당신 탓이 아니다”

험한 꼴도 많이 봤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비공개 쉼터로 대피시키자 가해자가 찾아와 깨진 소주병을 들고 “아내가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하라”고 난동을 부리는 정도는 일상에 가깝다. 피해자를 위해 마련된 전화 상담을 악용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가해자들을 응대하는 것도 고역이다.

고 대표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혼자 앓고 있을 피해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괴롭고 아프다”고 토로했다. 그는 “가정폭력과 성폭력은 사회적 통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범죄”라며 “그러다 보니 가해자만큼이나 피해자도 피해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니 성범죄 표적이 된 거 아니냐” “맞을 만한 행동을 했겠지” 등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히는 걸 목격한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은 물론 쉼터를 찾아오는 것조차 주저한다. 그래서 그는 피를 토하듯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는 말을 반복한다. 수십 년간 지속된 폭력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해 오히려 형사 처벌받아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법률적 지원도 제공한다. “나는 죄인이라 할 말이 없다”는 피해자를 찾아가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국민참여재판을 청구하기도 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수사기관의 인식과 대응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 대표는 “경찰은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가 만나는 최초의 공권력”이라며 “경찰을 신뢰할 수 있어야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의 ‘2016 가정폭력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부부폭력 피해자의 1.7%만이 경찰에 신고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최근 전국 423개 여성단체와 함께 ‘경찰의 여성폭력 대응 전면 쇄신을 위한 공동행동’을 꾸린 이유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달 2일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가정폭력피해자 쉼터에 가해자가 침입해 소란을 피웠는데도 경찰이 가해자를 옹호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며 항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오는 7일에는 경찰개혁위원회, 경찰청 인권위원회와 함께 ‘가정폭력에 대한 경찰 대응 전면 쇄신을 위한 정책제안’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30년의 변화가 또 다른 변화 꿈꾸게 하는 원동력”

고 대표는 눈물이 많다. 피해자들 얘기를 할 때면 수시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인터뷰할 때 울면 회원들이 ‘대표님 또 울었냐’며 혼내는데 큰일 났네…”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코끝은 빨갰다.

매일 마음이 무너지는 폭력을 접하면서도 16년을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궁금했다. 고 대표는 “과거보다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가정폭력이란 용어조차 없다가 가정폭력특례법이 생겨났고 ‘한국여성의전화라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왔다’며 찾아왔던 피해자가 이후 활동가로 힘을 보태기도 한다”며 “지난 30년 동안 한국여성의전화가 이룬 변화가 또 다른 변화를 꿈꿀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현장에서 피해자들과 교감하고 호흡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라는 게 고 대표의 설명이다.

내년에도 그는 지속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나가겠다는 각오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곁에’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정이다.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의 패러다임을 ‘보호’에서 ‘자립’으로 바꾸자는 게 핵심이다. 피해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폭력이 반복될 걸 알면서도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 대표는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자립센터를 설립하려고 한다”며 “피해자들이 6개월간 머물던 쉼터를 퇴소한 뒤 ‘다음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함께 고민해볼 것”이라고 다짐했다. 스토킹범죄 처벌법 입법도 한국여성의전화가 내년 한 해 역점을 두는 사업 중 하나다. 고 대표는 “최근 데이트폭력·스토킹 관련 상담이 크게 늘고 있다”며 “가정폭력특례법처럼 데이트폭력 역시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장기적으로 ‘여성폭력근절기본법’을 제정하겠다는 목표도 갖고 있다. 고 대표는 “다른 단체들과 함께 ‘국가의 책무성과 여성폭력에 대한 정의, 피해자의 인권보장과 가해자의 처벌원칙을 담은 내용의 기본법을 제정하자’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 한국여성의전화는

1983년 첫 가정폭력 상담소…한국의 여성인권운동사 '최초' 도맡아

“가정 내 폭력과 성폭력에 대해 아직도 사회가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관용적인 태도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의 창립 취지문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1983년 설립된 여성인권운동 단체로, 전국 25개 지부에서 200여 명의 상근 인력이 활동하고 있다. 회원은 약 1만 명에 달한다. 매년 모이는 기부금은 3억2000여만원이다. 서울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만난 한 활동가는 고장 난 난로의 전원을 만지작거리며 “살림살이가 빠듯한 건 시민단체의 숙명”이라고 멋쩍은 듯 웃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한국 여성인권운동사에서 ‘최초’를 도맡아왔다. 정부보다 앞서 국내 최초로 가정폭력·성폭력 전문 상담 서비스를 도입했다. 1987년에는 사무실 한쪽을 개조해 국내 최초로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쉼터를 마련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피해자 쉼터는 현재 12곳으로 늘었다. 1998년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들이 24시간 전화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여성긴급전화(1366)를 처음 개설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피해 여성에게 제공한 상담 건수만 91만 건에 달한다.

연중 캠페인, 여성인권영화제 등 인식 개선 활동뿐 아니라 여성인권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ELF(Empowerment Leadership Feminism)’ 개발 운영 등도 한국여성의전화가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다. 가정폭력·성폭력 관련 정책 감시 및 제안에도 적극적이다.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한국여성의전화의 궁극적 목표는 성평등 사회”라며 “이를 위해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상담·지원은 물론 여러 활동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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