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희 < 서울 서초구청장 gracecho@seocho.go.kr >
찬바람이 세상을 겨울 나라로 끌고 간다. 어느새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텅 빈 하늘을 이고 있다.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키우던 나무가 이제는 두 팔을 벌려 햇볕을 구한다. 빈손으로 한 줌 온기를 구하는 겨울나무에서 매정한 세월을 읽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올여름 도심의 횡단보도에서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던 ‘서리풀 원두막’도 마찬가지다. 무성한 나뭇잎 같던 차양을 접고 이제는 예쁜 트리로 변신해 추운 밤거리를 훈훈히 밝혀주고 있다.
서리풀 원두막은 서울 서초구의 횡단보도나 교통섬 등에 세워진 우산 모양의 그늘막이다. 한여름 폭포처럼 쏟아지는 자외선을 맞으며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안쓰러워 세우게 됐다. 그 조그만 배려가 감동으로 다가왔음인가. 적은 예산을 들였을 뿐인데 반향은 의외로 컸다. 소셜미디어에 칭찬 댓글이 줄을 잇고 언론에서도 호평이 잇따랐다. 당초 54곳에 설치했는데 확대 요구가 많아 120곳으로 늘렸다. 세금은 이런 데 써야 한다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사람들이 어떤 행정에 목말라 하는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던가. 고맙게도 서리풀 원두막은 베푼 것보다 훨씬 많은 기쁨을 안겨줬다. 창의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의 생활 행정으로 인정받아 상을 여럿 받은 게 그것이다. 이달 초 유럽의 권위 있는 친환경상인 그린애플상을 받은 것도 그런 기쁨 중 하나였다.
보는 높이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그린애플상을 받으러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으로 날아가며 보니 서리풀 원두막은 단지 서울 서초의 한 귀퉁이를 덮고 있는 게 아니었다. 시상식 진행자는 서리풀 원두막이 “자외선으로 뜨거워진 도시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다”며 축하했다. 그 순간 문득 지구를 쓰는 청소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늘 행복한 표정인 청소부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난 지구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오”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다. 높은 데서 바라보면 거리를 쓰는 것도 지구를 가꾸는 일이 된다. 서리풀 원두막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그늘막이지만 온난화에 시달리는 지구의 환경을 살리고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한 것들이다. 이 겨울에 서리풀 원두막은 120개의 트리가 돼 세상을 밝힌다. 겨울철에는 트리로 활용하자는 주민들 의견에 따른 것으로, 외부에서 받은 상금을 활용해 만드니 예산은 절약하고 의미는 더 빛난다.
꽃 한 송이가 있어 지구가 아름답다고 한다.
별빛 하나가 있어 온 세상이 환할 수도 있다. 서리풀 원두막의 작은 불빛이 이 겨울 세상의 모든 추운 가슴들을 훈훈히 데워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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