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 김태철 기자 ]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제3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1903년 11월이었다. 새로운 방사성 원소인 폴로늄(Polonium)과 라듐(Radium)을 발견한 공로였다. 여성이 노벨상을 받은 것도, 부부가 함께 수상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리 퀴리는 1906년 마차 사고로 남편을 잃었지만 연구에 매진했다. 1910년 염화라듐을 분해해 순수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고, 이듬해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10여 년 노벨상 역사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과학 분야 상을 받은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빛을 받으면 우라늄보다 400배 많은 에너지를 발생하는 라듐은 암 치료와 중성자 생성 연구에 긴요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순수 라듐은 추출하기 어려워 당시 천연 라듐 1g이 요즘 가치로 10만달러(약 1억1400만원)를 호가할 정도였다. 라듐 대량 추출 기술은 방사능 연구 및 치료 대중화를 활짝 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마리 퀴리는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특허권을 포기해 라듐을 인류 재산으로 돌렸다. 연구 결과를 돈이나 명예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과학자 정신’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프랑스 최고 훈장 ‘레종 도뇌르’도 거절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때는 연구실을 나와 야전병원을 누비며 환자 치료에 앞장섰다. 전 재산을 털어 엑스선 장비가 딸린 트럭 ‘리틀 마리’ 20대를 만들었다. 100만 명 이상의 부상병이 엑스선 진단을 통해 상처를 조기에 치료했다.
그는 1934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방사능 과다 노출로 인한 무형성 빈혈이었다.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방사성 물질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에는 방사능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리 퀴리의 연구는 딸과 사위가 이었다. 이렌 졸리오 퀴리와 그의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는 1935년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해 노벨 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극작가 겸 피아니스트인 마리 퀴리의 둘째딸 이브 퀴리도 노벨상과 인연이 있다. 그의 남편인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가 1965년 유니세프 대표 자격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퀴리 가문은 둘째 사위까지 포함하면 2대에 걸쳐 5명이 6개 상을 수상한 노벨상 최대 명문가다.
7일은 마리 퀴리가 태어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유로화로 통합되기 전 프랑스 최고액권인 500프랑 지폐에는 퀴리 부부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부부가 다녔던 소르본대에도 이들의 이름이 남겨져 있다. 4개로 나눠진 소르본대 중 파리6대학은 ‘피에르 마리 퀴리대학’으로 불린다. 프랑스 사람들이 그의 연구 업적과 희생정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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