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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루터 종교개혁 500년] 루터 개혁으로 신정일치 무너지고 개신교 시대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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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개인 등 근대정신 등장… 중세 무너져


[ 고기완 기자 ] 1517년 10월31일 마르틴 루터(1483~1546)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내걸면서 종교개혁을 요구한 사건은 인류 문명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 놓았다. 종교사적 의미에서 루터의 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와 교황이 좌지우지하던 신정일치(神政一致)를 깨뜨리고 개신교 시대를 연 일대 사건으로 평가된다. 인류 문명사적 측면에선 중세에 없던 개인, 자유, 국가, 민족,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고 결국 ‘근대로의 길’을 연 사건으로 해석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오늘날까지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타락과 부패로 물들었던 가톨릭

루터는 1483년 11월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인 독일 작센 안할트 주의 소도시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구리광산에서 광부로 일한 아버지는 아들 루터를 법률가로 키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21세이던 1505년 7월 루터는 길을 걷던 중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를 만난다. 겁에 질린 루터는 폭풍우에서 살아남게 된다면 수도자가 되겠다고 즉흥적으로 맹세했고 결국 그렇게 됐다.

1507년 사제서품과 1512년 박사학위를 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대 성서학 교수 자리까지 물려받은 행운아였다. 루터는 명강의자로 이름을 날렸다. 이해하기 쉽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하는 그의 성서 강의는 유명했다.

1513년 율리우스2세에 이어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부터 종교계가 더욱 부패하기 시작했다. 레오 10세의 사치스런 생활로 인해 로마 바티칸의 재정이 고갈됐고, 은행가로부터 돈을 빌려 쓴 교황은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31개 추기경직을 새로 만들어 600억원에 팔기도 했다. 고삐가 풀린 부패는 급기야 면죄부 판매에 이르게 됐다. 면죄부는 살인, 축첩, 신성모독, 도둑질, 위증 등의 죄를 저지른 사람의 영적 고통을 덜어주고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도 줄여준다는 일종의 교황증이었다. “봉헌함에 금화가 딸그랑거리며 떨어지는 순간 구원된 영혼은 천국으로 곧장 올라간다네.” 당시 면죄부를 팔러 다니던 판매책의 주문이 아직도 전해진다.

인쇄술 덕에 루터의 성경 변역 확산

루터는 성경, 복음, 참회를 통한 구원이 신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금전 거래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 불가였다. 루터는 반박문 21조에서 “교황의 면죄부로 모든 형벌을 면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잘못이다”고 못 박았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잇따랐다. 프랑스의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가 ‘성서 중심의 복음’을 부르짖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경건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칼뱅의 프로테스탄티즘도 이때 생겨났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자본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프로테스탄티즘을 낳았다(막스 베버)는 해석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이라는 개념이 이때 솟아올랐다는 해석도 있다. 루터는 개인도 성서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봤다. 어떤 중재자의 명령이나 강제가 없이도 오로지 청하는 이의 양심과 참회만으로 절대자와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는 교리는 당시 생소한 것이었다. 왕, 황제, 교황, 교회 등 계급 신분이라는 집단적 개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 같은 개인과 자유는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핵심 개념이다.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폭발을 불러왔다. 그의 95개조 반박문은 순식간에 인쇄돼 유럽으로 퍼졌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도 ‘찻잔 속 태풍’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루터의 성경 번역이 대성공을 거둔 것도 인쇄술 덕분이다. 바르트부르크에서 숨어지내던 시절 루터는 신약성서 27권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다. 성경을 가질 수 있다는 현실이 루터를 지지하는 뒷배로 작용했다.

루터는 또 사제들의 결혼을 교리로 옹호했다. ‘양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 말씀이 왜 사제들에게 적용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루터는 수녀였던 카타리나와 결혼해 여섯 자녀를 낳았다. 루터는 신약성서의 유일한 명령은 사랑과 믿음임을 강조하고 가톨릭의 미사 절차와 도구들을 비판했다. 가톨릭과 완전히 다른 교리였다.

신정일치 시대의 종말

종교개혁은 종교가 곧 정치였던 중세의 신정일치를 없애고 정교분리를 통한 국가통치 개념을 강화했다. 가톨릭 교황의 지배에서 풀려나기 시작한 나라들은 제각기 왕과 황제를 세우고, 국교와 개신교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루터정신은 강력한 독일국가와 민족을 형성하는 이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루터교는 말년에 유대교를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는 훗날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명분으로 작용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 루터의 종교개혁은 현대 종
교에도 똑같은 문제의식을 던진다. ‘종교는 안녕한가’라고.

◆NIE 포인트

루터가 종교개혁을 요구한 당시 종교 상황과 종교개혁이 중세를 무너뜨리고 근대를 열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고기완 한경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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