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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귀주대첩과 '강감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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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서울 관악구는 고려시대 명장(名將) 강감찬 장군(948~1031)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장군은 낙성대(落星垈)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날 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성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헌동은 장군의 시호를, 은천동은 아명을 딴 지명이다. 생가 터도 있다. 장군의 5대조인 강여청이 신라시대부터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부친인 강궁진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면서 명망가 집안으로 부상했다.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묘는 충북 청주시 국사리에 있다. 조선 인조 때 장군의 17대 손(孫)인 소현세자빈 강씨가 왕의 음식에 독약을 넣은 배후자로 지목돼 죽음을 맞으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 후손들은 장군의 묘까지 훼손될 것을 우려해 몰래 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악구청은 2019년 ‘귀주(지금의 평북 구성시) 대첩’ 100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부터 10월에 ‘관악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는 오는 20~21일 낙성대 공원 일대에서 추모제향, 출병식과 전승행렬 행사, 무용 연극 노래 공연 등이 펼쳐진다.

귀주대첩은 장군의 탁월한 계략과 우수한 군사력이 원동력이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거란 소배압은 1018년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황제 친위군까지 포함된 최정예 기병들이 주축을 이룬 3차 침입이었다. 앞서 거란은 1차(993년), 2차(1010년) 침공을 했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철수했다.

고려는 장군이 주축이 돼 거란의 2차 침입 뒤 철저하게 대비했다. 5만 명이 안 되던 군사수를 20여만 명으로 늘렸다. 강도 높은 훈련을 해 정예병사로 만들었다. 거란군의 기병에 맞설 수만 명의 기병도 육성했다.

적의 공격로를 미리 파악한 뒤 흥화진(평북 의주군)에서 소가죽으로 하천을 막아놓았다가 터트려 승리를 거뒀다. 거란군은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개경을 향해 진격했다. 장군은 기병으로 별동대를 구성, 치고 빠지는 식으로 거란군을 괴롭히며 전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거란군은 개경 점령을 포기하고 회군했다.

모든 병력을 전략적 길목인 귀주에 집결시킨 장군은 거란군을 포위해 대파했다. 살아남은 거란군은 20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거란의 성종은 소배압에게 전령을 보내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고 책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란에 치욕을 안겨준 장군은 전란 이후에는 개경 외곽에 성곽을 쌓는 등 튼튼한 국방을 위해 힘썼다.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고도 외침 가능성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병자호란 수모를 당한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핵·미사일 도발을 일삼는 북한과 대치하는 엄중한 시기에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을 깊이 새겼으면 한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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