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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 칼럼] 삼전도가 어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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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380년 전인 1637년 2월24일(음력 1월30일). 평민 복장을 한 인조가 청 태종 앞에 무릎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렸다. 신하가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용포를 입지 못한 것은 패전국의 ‘죄인’이기도 하지만 명나라 의복을 허용할 수 없다는 청의 지침에 따른 것이었다.

항복의 예가 끝나고 인조는 청이 준 의복을 입었다. 의복 제도는 ‘천자’가 결정해 제후와 신하에게 내리는 것이었기에 상징성이 컸다. 명나라에서 내려온 의복 장구류는 반납해야 했다. 조선은 한때 ‘동생의 나라’였던 만주족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국으로 전락했다.

이 굴욕의 현장인 삼전도(三田渡)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나루다. 궁궐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목이자 영남로를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영화 ‘남한산성’이 흥행하면서 “삼전도가 어디 있는 섬이냐?”고 묻는 이가 많지만, 섬 도(島)가 아니라 건널 도(渡)자를 쓰는 나루터다. 지금은 시가지로 변했다.

병자호란이 터진 것은 1636년 12월28일(음력 12월2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7일 만에 도성까지 치고 들어왔다. 인조는 두 왕자와 비빈 등을 강화도로 보내고 곧 따라가려다 청군에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이곳에서 47일간 초근목피로 버텼지만 강화도가 함락되고 왕족들이 압송되자 항복했다.

청군이 1주일 만에 도성을 함락한 배경에는 정치·군사적인 전략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청은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와 싸우느라 교역이 끊어진 상태였다. 주요 수입원인 인삼, 모피의 판로가 막히자 경제가 휘청거렸다. 식량위기까지 겹쳤다. 백성들에게 줄 배급이 줄어들자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인조는 무능했고 북방 방어선은 허술했다. 지휘권은 전투경험이 없는 중앙 대신들이 가졌고 군사들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다. 그 허점을 파고 든 청군은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냈다. 결국 금·은·곡식 등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치러야 했고 60만 명을 노비로 바쳐야 했다.

치욕의 역사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다. 청 태종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데다 최단 기간에 최대 이윤을 남기는 전쟁의 기술까지 갖췄다. 천하를 ‘중화(中華)’와 ‘오랑캐(夷)’로 나누는 흑백논리에 갇힌 조선은 청맹과니였다. 승부는 뻔했다. 물론 만주족이 자신의 말과 글을 잃고 한족에 동화돼 사라진 것을 보면 영원한 승자는 없는 것 같다.

1639년 세워진 삼전도비는 송파대로 확장공사 때 잠실동 석촌호수 옆으로 이전됐다. 한때 페인트 테러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지금도 냉엄한 국제관계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로 그 자리에 서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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