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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찾기] 사도세자의 비극·장희빈의 한이 서린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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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궁궐 정전중 가장 오래된 명정전
왕·세자가 기거하던 환경전 눈길



[ 마지혜 기자 ] 조선의 3대 왕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자신이 머물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의 서울 와룡동에 수강궁을 지었다. 1483년 9대 임금 성종은 수강궁 터에 창경궁(사적 제123호)을 세웠다. 세조비 정희왕후와 예종비 안순왕후, 자신의 어머니인 덕종비 소혜왕후 등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위치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한다.

창건 초기엔 궁의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 그런데 경복궁이 1592년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먼저 재건되면서 궁의 쓰임새가 높아졌다.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맡고 인접한 창경궁은 왕실의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창경궁은 이내 조선왕조 역사상 중요한 사건들의 배경이 됐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에서는 국가의 큰 행사가 열렸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의 새해 인사를 받거나 외국 사신을 맞았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명정전 뒤편에 자리잡은 숭문당은 왕이 학자들을 불러 학문을 논하고 대화를 나누던 곳이다. 창경궁에서 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은 문정전이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는 혼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문정전 앞뜰에는 사도세자의 비극이 서려 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노론은 어릴적부터 노론을 싫어한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위기를 느끼고 영조에게 온갖 모략을 고했다. 노론 세력이었던 세자의 처가와 누이 등이 이에 합세했다.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마저 영조에게 유언비어를 보탰다. 사도세자는 결국 문정전 앞뜰에 놓인 커다란 뒤주에 갇혔다. 그는 더위와 허기에 8일 동안 신음하다 1762년 28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경춘전과 환경전에는 왕실의 생로병사가 어려 있다. 창경궁의 침전인 경춘전에서 정조와 헌종 등이 탄생했다. 정조는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다.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한 곳으로 추정된다. 풍증과 그에 따른 합병증을 앓던 중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중종은 병상에 있을 때 여기에서 대장금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다. 대장금은 조선시대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다. 중종실록에는 대장금이 1524년부터 1544년까지 왕을 진료한 기록이 있다.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지어진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쓰였다. 내전의 으뜸 전각인 이곳은 월대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올린 건물이다. 연회나 의례를 여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돌을 깔고 서쪽 마당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을 만들었다. 보물 제818호다.

통명전에는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의 투기와 한이 녹아 있다. 궁녀였던 장옥정은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고 왕자 균을 낳아 희빈 자리에 올랐다. 장희빈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 다툼 속에서 왕비가 됐다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 한을 품은 그는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었다가 발각돼 사약을 받았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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