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개성에서 머릿기름, 세안수를 만들기 시작
설화수 등 대성공…'화장품 한국' 세계에 알리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
한국 화장품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에 와서 사가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도 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다. 국산 화장품은 랑콤이나 시셰이도 같은 외제 화장품보다 급이 한참 낮은 것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
창업자는 서성환··· ‘아모레’ 탄생
이렇게 된 데에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회장의 역할이 컸다. 연구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서 국산화장품의 품질을 높였다. 또 일찍부터 한국 화장품의 해외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물론 K팝과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한국 화장품에 대한 인기로 이어진 측면이 있지만 그 전에 품질과 판로 개척을 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모레퍼시픽의 뿌리는 개성의 창성상점이다. 1932년 개성에 살던 윤독정 여사가 머릿기름, 세안수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다. 아들인 서성환도 거들기 시작했고 모자(母子)가 같이하는 사업이 됐다. 가게 이름은 창성상점이었다. 해방 후 서성환은 서울로 옮겨와서 태평양화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화장품 제조판매를 시작했다. 6·25전쟁으로 내려간 부산 피난지에서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가 큰 히트를 친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서도 화장품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1961년에는 <아모레>를 화장품의 이름으로 정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라는 가사에서 따온 단어인데 당시 누구나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유행하던 노래의 가사였다.
태평양화학을 바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태평양화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해갔다. 서성환의 차남인 서경배가 태평양화학에 들어간 것은 1987년이다. 그 무렵 회사는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86년 화장품시장이 개방되면서 국산 화장품의 매출이 급감했다. 태평양화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다각화도 큰 부담이었다. 단순한 화장품 회사를 벗어나 종합그룹이 되겠다며 전자, 금속, 건설, 증권, 패션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가 쌓였다. 심지어 태평양돌핀스라는 농구단까지 두게 되었다.
새로 기획실장이 된 서경배는 고심 끝에 문어발 같은 다리들을 모두 잘라 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본업인 화장품에 모든 힘을 쏟아야만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본업 이외의 계열사들은 모두 매각하자며 부친인 서성환 회장을 설득했다. 1991년 태평양증권, 태평양경제연구소, 태평양투자자문을 선경그룹(현재 SK)에 매각하는 것을 시작으로 10년에 걸쳐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작업을 완수한다. 이렇게 선제적으로 몸집을 줄인 덕분에 1998년의 외환위기에서도 태평양화학은 건재할 수 있었다. 모두가 매출이 줄어서 부도를 염려하는 시기에 아모레퍼시픽의 매출은 오히려 증가했다. 서경배가 맡으면서 태평양화학은 위기를 벗어났고 화장품 전문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서경배, 한국 화장품을 세계화
서경배는 연구개발과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두 가지에 힘을 쏟아부었다. 연구개발은 선대인 서성환 회장도 중요시하던 바였지만 서경배는 더욱 힘을 쏟았다. 1997년 한방 화장품인 ‘설화수’와 세계 최초의 ‘레티놀 아이오페’를 출시할 수 있었다. 2008년에는 ‘에어쿠션 파운데이션’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화장품을 발명하는 데도 성공했다.
해외 진출에도 힘을 쏟았다. 해외 현지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한 별도의 브랜드와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동남아 소비자를 위해서는 설화수와 이니스프리, 라네쥬, 유럽의 소비자를 위해서는 롤리타렘피카, 미국 소비자를 위해서는 아모레퍼시픽 브랜드를 마련했다. 현지 판매망 개척에도 힘쓴 결과 특히 중국에서의 성과가 눈부시다.
안타깝게도 아모레퍼시픽이 사드 갈등의 후폭풍에 휩싸여 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가 냉랭하게 돌아서서 매출이 급감했다. 하지만 20년 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거치며 세계적 화장품 기업으로 재탄생했듯이 이번의 위기도 잘 이겨내길 바란다.
■ 기억해 주세요
과거 우리나라가 못 살 때 직장인들이 일본 등 해외로 출장 가면 꼭 사오던 것이 여성용 화장품이었다. 시대가 변해 지금 중국 등 아시아 국가 관광객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한국의 화장품을 사간다. 아모레퍼시픽은 창성상점에서 시작됐다. 머릿기름을 팔던 상점이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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