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정환 기자 ]
애견옷 디자이너 양현정 씨(39)는 멕시코 교도소에 1년 반 넘게 수감돼 있다. 지난해 1월 여동생을 보러 멕시코에 온 양씨는 여동생의 약혼자가 운영하는 노래방에서 장부 정리를 돕다 인신매매 및 성매매 혐의로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통역은 허술했고 멕시코 경찰은 양씨에게 귀가를 조건으로 허위 진술서에 사인을 요구했다. 자국민의 인권 침해 여부를 확인해 법적 조력을 제공해야 할 이임걸 전 주멕시코대사관 경찰영사(총경·현 서울지방경찰청 치안지도관)는 자신이 양씨를 대변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감사원은 감사 결과에서 “(이 전 영사가) 멕시코 근무를 시작한 지 11개월이 넘도록 (양씨에게) 영사 조력권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업무 전문성 결여)”고 밝혔다.
연간 해외 여행객이 2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건·사고도 급증하고 있다. 살인·납치 등 강력범죄도 매년 수백 건씩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유 여행객들이 즐겨 이용하는 에어비앤비(숙박 공유) 우버(차량 호출) 등 서비스가 범죄 수단으로 악용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외교부에 파견돼 근무하는 경찰영사의 자질과 역량은 기대 이하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문재인 정부가 ‘해외 체류 국민 보호 강화’를 100대 국정과제로 내걸고 사건전담 영사를 두 배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인 만큼 관련 인력의 질적 개선책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해외 범죄 피해 10년 새 세 배 급증
해외 여행자 및 재외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매년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28일 외교부에 따르면 내국인의 해외 범죄 피해 건수는 2006년 2930건에서 지난해 9290건으로 10년 만에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해외 출국자 수가 1161만 명에서 2238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난 것에 비해 상승세가 가파르다.
범죄 유형별로 살펴보면 절도(6910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강도 180건 △강간 등 성범죄 57건 △살인 19건 등 강력범죄도 매년 300건 안팎씩 발생한다. 납치·감금된 재외 국민만 113명에 달한다.
이는 단체관광보다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최근 경향과 무관치 않다. 작년 9월 중앙부처 사무관 A씨(여)는 홀로 일본 알프스로 여행을 떠났다. 모처럼 홀가분하게 떠난 휴가였지만 그는 1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종 상태다. 그의 마지막 기록은 아침 산장에서 나가는 모습이 전부다. 산세가 험하고 때때로 악천후가 몰아치는 3000m 고지인 일본 알프스에선 2013년에도 5명의 한국인 산악회원이 실종된 바 있다. 외교부는 A씨의 납치 여부조차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범죄의 온상’ 된 차량·숙박 공유 서비스
최근 자유여행자들의 필수 앱(응용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에어비앤비, 우버 등 서비스 이용자를 노린 범죄도 늘고 있다. 지난 16일 일본 후쿠오카에선 에어비앤비 민박집에 묵은 한국인 여성(31)이 일본인 집주인(34)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값싼 교통 요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우버 리프트 등 차량 공유 서비스도 잇따른 사건·사고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2014년 인도에서 20대 여성이 우버 기사에게 강간당한 이후 비슷한 신고가 미국에서만 100여 건 가까이 속출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 측은 문제가 된 기사나 호스트(숙박 제공업체)의 등록을 취소하고 강도 높은 자정 노력을 펼치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적으로 자신의 플랫폼에서 활동 중인 수십만 명의 서비스 공급자를 일일이 감시 감독하는 건 불가능하다.
특히 현지 경찰에 신고하기 어려운 외국인은 손쉬운 표적이 된다. 길어야 1주일 여행하는 경우가 많아 억울한 일을 당해도 꾹 참고 넘어가기 일쑤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현지인에게 당한 성폭행 등에 대해 수치라고 생각해 신고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이처럼 드러나지 않은 사고까지 감안하면 실제 건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영사는 승진 도움 안 되는 한직”
전문가들은 허술한 해외 국민 보호체계가 문제를 키우고 있다고 지적한다. 외교부에 따르면 전 세계 163곳에 마련된 재외 공관 가운데 국내 경찰관이 파견된 곳은 55곳(65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사건·사고 담당 영사 숫자를 65명에서 154명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상담사와 자원봉사자 등 80명으로 구성된 영사콜센터를 경찰청, 행정안전부, 해양수산부, 국가정보원, 국방부 등 유관부처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해외재난안전센터로 확대·강화하는 안도 국회에 제출돼 있다.
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홍철호 바른정당 의원은 “해당 국가 언어나 문화, 한국인 대상 범죄 사건에 대한 대응능력 등 전문성보다는 그저 경력을 위한 징검다리나 부처 간 보직 나눠먹기식 관행의 개선 없이 숫자만 늘려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경찰 내부에서는 경찰영사 경력이 승진에 불리하다는 얘기가 많다. 3년간 외국에 나가 있다 보면 인사권자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대형 사건 수사 등 눈에 띄는 실적을 내기 좋은 본청이나 주요 지방청, 핵심 지역 경찰서에서 일한 동료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다만 아직 승진과 거리가 먼 젊은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경찰영사직의 선호도가 높은 편이다. 미국 일본 유럽 등 거주 환경은 좋고 강력 범죄 발생률은 낮은 곳이 특히 인기다. 반면 살인 납치 실종 등 강력 사건이 많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중남미 등 일부 지역은 인기가 덜하다. 때론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경찰관의 ‘귀양지’가 되기도 한다.
동남아에서 경찰영사로 활동한 한 고위 경찰은 “범죄의 국제화로 경찰 역할이 국내에만 머무를 수 없는 만큼 경찰영사에 대한 경찰 내 시각이나 승진 등 처우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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