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비즈니스 외교 없이 '비즈니스 대통령' 트럼프와 통할까
양국 경협 의제 조율 시작도 못해
기업사절단 구성도 '오리무중'
재계 "경제이익 지킬 기회인데…"
[ 안재석 기자 ]
6월 말 열릴 예정인 한·미 정상회담이 경제 분야를 뺀 ‘반쪽짜리’ 회담에 그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 기업의 투자·수출과 통상 문제에 대한 목소리를 전달할 창구 자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양국이 조율해야 할 정책적 의제도 사전 논의가 실종된 상태다. 전통적으로 한·미 관계를 움직여 온 두 개의 바퀴인 경제와 안보 중에 한 바퀴가 공전하면 정상회담 의미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는 재계 총수를 비롯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대거 동행했다. ‘경제사절단’이라는 이름을 달고 한·미 양국의 통상 및 경제 분야 현안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번에는 판이하다. 얼마 전 한국경영자총협회를 향한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질타로 재계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경제계를 대표할 사절단을 꾸리려는 움직임조차 감지되지 않는다. 정부 관계자는 “현재로선 실무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고 말했다. 이례적으로 경제사절단을 뺀 정상회담이 될 공산이 커진 것이다.
유력하게 거론되는 방문 기간은 오는 19일부터 시작되는 주간.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 한국 경제인들의 일정은 어떻게 급하게 바꾼다 해도 협상 파트너인 미국 고위 관료와 재계 거물들의 일정까지 조율하긴 쉽지 않은 시간이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기업인들은 한국 대통령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인 한국 기업인을 더 만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국에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데 미리 시간을 비워 둘 미국 재계 인사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방미 한달 앞인데 '경제사절단' 말도 안나와
미국 비자 완화 등 양국교류 물밑 역할한
한·미 재계회의 이번엔 전혀 작동 안해
미국, FTA 재협상·보호무역 파상 공세
"워싱턴 움직이려면 미국 기업 도움 받아야"
경제사절단을 꾸릴 주체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미 정상회담에 참석할 재계 인사를 구성하는 역할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도맡아 왔다. 이젠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뒤 전경련은 회원사 이탈 등으로 존폐 위기를 맞고 있다.
인력도 이미 절반 가까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떠났다. 정부에 사절단 얘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시그널도 없다. 새 정부가 정상회담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외교·안보 문제에만 방점을 찍어 회담을 추진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정부 관계자는 “북핵과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자유무역협정(FTA) 등 외교적 현안이 워낙 많은 상황”이라며 “국정기획자문위원회와 청와대 실무진에서 기업인들을 어느 정도 동행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사절단을 꾸린다고 해도 그 규모는 매우 작을 것”이라고 했다. 이 경우 기업 간 투자 관련 양해각서(MOU) 체결이나 비즈니스포럼 같은 행사는 거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 현안은 산적해 있는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은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해야 한다. 한·미 FTA 재협상 등 한국 경제를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직·간접적인 압박은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미국 기업을 대신해 외국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지난 30일 외국산 태양광전지 수입에 대한 세이프가드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을 세계무역기구(WTO)에 공식 통보했다. 무역법 201조에 따르면 특정 품목의 수입 급증으로 미국 해당 산업이 상당한 피해를 봤거나 피해가 우려될 경우 관세를 부과하거나 수입량을 제한하는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다.
5월20일엔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 수입에 무역확장법 232조를 발령하는 내용의 행정각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외국산 철강 수입이 미국의 안보를 침해하는지를 조사하라는 지시도 상무부에 내렸다. 한 기업 관계자는 “미국 정치권과 재계는 한몸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며 “미국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려면 미국 기업을 움직이는 게 효율적”이라고 했다. 미국 기업들의 관심을 받는 한국 기업들이 소통의 창구로 활용돼야 한다는 얘기다.
일본도 경제 문제를 풀어가는 작동원리는 비슷하다. 재계가 애로사항을 전달하면 정부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대신 정부는 기업에 수출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독려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해외 순방에도 재계 인사들이 대거 따라간다. 정부와 재계의 연결고리는 게이단렌이다. 게이단렌은 일본 재계를 대변하는 이익단체다.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게이단렌이 아베 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물밑에서 이뤄진 성과들
그동안 한·미 양국 관계에 기업인이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창구는 양국 기업인 모임인 한·미 재계회의가 담당했다. 한·미 FTA가 대표적이다. 2000년 한·미 재계회의는 전경련과 함께 양국 간 FTA를 공동으로 제안했다. 이를 토대로 2006년 정식 협상이 시작됐다.
미국 비자가 면제된 데도 양국 기업인의 노력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 윌리엄 로즈 전 한·미 재계회의 위원장은 최근 한국경제신문 기고문을 통해 “재계회의 미국 측 위원장을 담당하고 있을 때 전경련 주한미국상공회의소와 함께 미국 의회 등 주요 기관에 공동서한을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며 “이런 노력이 한국을 비자면제국가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낳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씨티은행장으로 활동한 로즈 전 위원장은 한국의 단기채권 만기 연장 협상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공로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미국 상하 양원 합동연설을 하게 된 것도 한국 기업들의 물밑 요청을 받은 미국 기업들이 미국 의회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선 이 같은 양국 재계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양국 경제계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GDP의 3% 정도지만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 금액은 0.3%에 불과하다”며 “외국 기업들이 한국 투자를 늘려야 일자리도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재석 기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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