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 < 소설가 >
5월, 이 무렵이 되면 늘 떠오르는 선생님이 있다. 선생님은 스물다섯 살의 새신랑으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지 마을 학교로 전근을 오셨다. 5학년이던 우리들은 곧 6학년이 됐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가는 것도 시험을 봐서 가던 시절이었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마을의 몇 집을 빼곤 모두 가난해 한 학년 쉰 명쯤 되는 아이들의 절반은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학기 초부터 선생님은 한 명의 제자라도 더 중학교에 보내려고 논둑으로 밭둑으로 아이들의 부모를 찾아다니며 어른들을 설득했다. 어떤 집은 10리 길을 세 번 네 번 찾아가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 덕에 한 해 윗반이나 한 해 아랫반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갈 수 있었다.
입시 열풍도 대단해 도시의 6학년 아이들 거의 모두 입시 과외를 했는데, 강릉 시내의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도 그랬다. 선생님은 우리 산골 아이들의 공부를 위해 강릉 시내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와 학교 옆에 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그래야 아이들을 저녁에도 교실로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린 제자들 공부 때문에 사모님도 강릉 시내에서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골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
이삿짐을 아이들이 날랐다. 동네 방앗간에서 빌린 리어카에 이불 보퉁이 하나, 솥 하나,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더구나 그때 사모님은 막 아이를 낳은 다음이라 도저히 산골 학교 옆으로 들어와 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선생님과 사모님은 시골 벽촌의 어린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했다.
낮에 공부가 끝난 다음 저마다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갔다. 아이들 책상엔 등잔이, 선생님 책상엔 작은 남포가 놓였다. 그때 선생님 책상에 놓인 남포의 상표가 ‘희망등’이었다. 아이들은 남포를 ‘희망등’으로,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공부뿐 아니라 선생님의 별명 그대로 아이들의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르쳐주었다. 어린 아이들 눈에도 선생님과 사모님은 사는 모습으로도 참으로 예쁘고 바른 모범을 보였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사는 모습이 어린 제자들에게도 너무 좋게 보이고 부러워 여자 아이들 중에는 이다음 자기도 어른이 되면 꼭 저렇게 살아야지 하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사모님이 낳은 아이를 여자 아이들이 서로 돌아가며 업어줬다.
선생님은 예전 시절의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만 42년 계시다가 정년퇴임하셨다. 강릉에 계시는 권영각 선생님. 어른이 된 다음 평생을 교단에 몸을 바치셨다. 10여 년 전 퇴임식할 때 그때까지 선생님께서 가르치셨던 많은 제자들이 참석했다. 선생님은 참석한 제자들의 이름을 적게 한 다음 그것을 들고 단상에 가 앉으셨다. 지금은 대학교수를 하는 산골 학교 출신의 옛 제자가 ‘희망등’을 밝혀놓고 공부하던 시절 선생님의 은혜에 대해 얘기할 때 단상에 앉은 선생님도, 젊은 시절 선생님이 가르친 여러 학교의 제자들도, 또 그날 그 자리에 온 다른 많은 선생님과 손님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모두 어른인데도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퇴임하신 지 10년이 지났어도 선생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인생의 큰 스승으로 우리 마음 안에 ‘희망등’을 들고 서 계신다.
이순원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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