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 운동복에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선글라스를 끼며 걸어오는 여성이 있다. 뒤로는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따라온다.
여성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나지막히 읊조린다. "거, 개혁하기 딱 좋은 날씨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공개한 온라인 광고의 한 장면이다.
광고 속 심 후보의 말은 영화 '신세계' 에 나온 대사(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 광고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지 나흘 만에 조회수 17만9000건을 돌파했고 '좋아요'는 2850건을 기록했다. 480개가 넘는 댓글도 달렸다.
◆ 유세 현장보다 뜨거운 광고전
유튜브에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공개한 광고 영상 '정책은 언제나 목마르다'도 올라왔다.
추미애 더민주 대표와 금태섭 의원이 나오는 이 영상은 한 온라인 쇼핑몰 CF를 패러디한 것으로, 6일 만에 조회수 30만건에 육박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TV, 온라인, 포스터, 캠페인을 활용한 각 당 후보들의 광고전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후보자 얼굴이 아예 나오지 않는 파격 TV 광고가 있는가 하면 단 한 줄의 문구로 열 가지 정책 공약보다 더 큰 인상을 주는 포스터 광고도 있다.
문 후보는 참신한 방식의 각종 광고로 이번 대선에서 가장 주목받는다.
TV 광고에서는 '당신이 꿈꾸던 대한민국 문재인이 이루겠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공약과 관련한 영상을 보여주며 감성을 자극한다.
문 후보 얼굴이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되지 않지만 2012년 대선 당시 선보였던 TV 광고에 비해 더 따뜻하면서도 세련됐다는 평가가 많다.
'파란을 일으키다'라는 포스터 광고도 화제가 됐다. 문 후보를 상징하는 파란색 페인트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따른 폐해를 의미하는 녹색 강물을 덮는 내용을 담은 포스터다. 이 포스터는 SNS를 통해 번지며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런가하면 문 후보 주요 공약을 볼 수 있는 홍보사이트인 '문재인 1번가'는 오픈 직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접속 폭주로 마비되기도 했다.
문 후보 광고 전략의 상당 부분은 같은 당 손혜원 의원과 윤영찬 SNS본부장,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 의원은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교수를 역임했고 '참이슬''엔젤리너스' '힐스테이트' 등의 브랜드를 만든 광고업계 전문가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얼굴없는 TV 광고와 당명을 뺀 포스터 광고로 화제가 됐다. 두 광고 모두 광고 천재로 불리는 이제석 광고연구소 대표의 작품으로, 다른 후보들과 확실히 차별화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포스터 광고의 경우 당명 대신 '국민이 이깁니다'라는 문구로 변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심 후보는 경제성과 효율성을 고려해 트위터, 유튜브를 활용한 모바일 광고에 집중한다. 딱딱한 이미지를 버리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패러디 광고 등을 통해 '심블리'(심상정+러블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현재 심 후보의 트위터 팔로워 수는 69만여명으로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 이어 3위를 달리고 있다.
◆ 역대 대선 당선자 광고 인상적
그렇다면 역대 대선에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광고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결과론적일 수는 있지만 대체로 당선자들의 광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TV광고가 시작된 1992년 14대 대선부터는 각 후보의 슬로건 만큼이나 TV광고가 많이 회자됐다.
14대 대선의 승자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새벽부터 나와 상도동 주민들과 조깅을 하는 모습을 TV광고에 담았다.
이와 함께 "임기를 마치면 빈 손으로 다시 이 집에 돌아와서 살 것입니다"라는 멘트를 통해 비리로 얼룩졌던 전 대통령들과의 차이를 부각시켰다.
15대 대선에서의 TV광고는 역대 대선 TV광고 중 가장 파격적인 광고로 손꼽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 DOC의 노래 'DOC와 춤을'을 개사한 'DJ와 춤을'을 선보인 것.
정치인이라 하면 근엄한 이미지가 일반적이었던 상황에서 직접 춤을 추며 노래했던 김대중 후보가 차가운 이미지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는 데 TV광고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16·17대 대선에서는 '서민 이미지' 광고가 성공을 거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통기타를 들고 상록수를 부르는 모습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밥집에서 국밥을 먹는 모습을 광고에 담으며 서민 대통령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대선 슬로건 중에는 '승리의 보증수표'라 불릴 만한 것들도 있다. 바로 '준비된 대통령'이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들고 나와 당선됐다. 이번 대선에서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나는 재수에 강하다.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슬로건'만' 남은 사례도 있다. 2012년 민주당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는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다. 하지만 이 슬로건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서민의 복지'를 대표하는 구호로 살아남았다.
◆ 미국 대선은 정치 마케팅의 꽃
대선 후보들의 광고전은 미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대선은 광고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정치 마케팅의 꽃으로 불린다.
주로 자신의 강점을 세련되게 부각하면서도 상대의 약점을 아프게 꼬집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한다.
'이미지 메이킹'이라던지 '네거티브 전략' 같은 요즘엔 흔한 선거 전략들 대부분이 과거 미국 대선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들이다.
이중 상대의 약점을 꼬집어 반사적 이익을 얻는 정치 마케팅인 '네거티브 전략'의 고수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꼽힌다.
그는 1988년 대선에서 참신한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던 듀카키스 민주당 후보를 '무차별 네거티브'로 꺾었다.
그중에는 "듀카키스 부인이 성조기(미국 국기)를 태우는 것을 누가 봤다더라" 같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있었다. 언론은 부시의 입에 주목했고 대부분의 이슈가 공화당 중심으로 돌아갔다.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효과적인 광고 전략 덕에 열세였던 지지율을 뒤집고 당선됐다.
트럼프의 승리 요인으로 '메세지의 단순함'을 꼽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무식해보인다'는 본인의 이미지상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너무 복잡해 속을 알 수 없다'는 경쟁자(힐러리 클린턴)의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두 후보간 선거 전략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양 캠프의 슬로건이다. 트럼프 선거 캠프에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슬로건을 따라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썼다.
힐러리 측은 여러 번의 교체(원래는 '나는 그녀를 지지한다') 끝에 '함께하면 강하다'로 정했다.
미 언론 MSNBC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국제사회에서 떨어진 위상에 좌절하던 미국 시민들의 마음을 한번에 일으켜세운 간명한 메세지였던 반면 힐러리는 끝까지 복잡했다"고 논평했다.
권민경/김아름/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k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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