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편집국 부국장 chabs@hankyung.com
한반도 전쟁설만큼이나 한국에서 전쟁 나기 어려운 이유도 소셜미디어 등에 많이 떠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붙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쌍방에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한 군사대치 상황 등이 어느 쪽이든 ‘불장난’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30만명에 달하는 한국 체류 미국인 때문에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뜻 대북(對北) 선제타격을 하기 힘들 것이란 얘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의 반도체 공장이야말로 전쟁을 막는 안전판이란 생각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한국 반도체산업의 글로벌 위상을 보면 이해가 간다. 작년 4분기(10~12월) 기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D램이 72.6%, 낸드플래시가 46.4%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PC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전자기기엔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 자동차에도 수백개가 내장돼 있고, 철강 석유화학 등 공장에도 곳곳에 박혀 있다.
한국, 전 세계 메모리 70% 공급
이런 메모리 반도체의 70% 이상을 한국이 전 세계에 공급한다. 상상해 보자. 한국에 전쟁이 터져 북한이 장사정포와 스커드미사일로 수도권을 포격하면 경기 기흥, 화성, 평택, 이천 등에 집중돼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은 멈출 수밖에 없다. 두 회사의 반도체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면 반도체값은 10배 이상 급등하고 결국 전 세계 주요 공장도 설 수밖에 없을 거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공급이 끊기면 이를 당장 대체할 곳도 없다. 미국 마이크론, 일본 도시바 등 다른 메모리 반도체업체 공장은 이미 풀가동 중이다. 생산을 더 늘리고 싶어도 못 늘린다. 반도체 공장은 새로 짓는 데만 2~3년 걸린다. 공장을 다 짓고도 설비 테스트하고 양산하는 데 또 1년 이상이 필요하다.
1970~1980년대 중동에서 전쟁이 나면 기름값이 폭등해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인 지금은 ‘산업의 쌀’ 반도체가 원유 이상의 경제 생명줄 역할을 한다. 한반도 전쟁으로 일시적이나마 한국의 반도체 생산이 중단되면 오일쇼크 뺨치는 ‘칩(chip) 쇼크’가 닥친다. 그 쇼크는 중국에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한국이 수출하는 반도체의 60% 이상을 가져다 쓴다. 중국 경제가 받는 충격파는 회복기에 접어든 미국 경제에도 그대로 전달될 거다. 이런 위험한 선택을 트럼프 대통령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쉽게 할 수 있을까.
'수출 효자상품' 이상의 가치
반도체는 단순한 수출 효자산업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전략적 안보산업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 1등 반도체 공장이 핵무기처럼 전쟁 억지력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도체산업이 이런 역할을 지속하려면 세계 1등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 한국이 반도체 패권을 잃는 순간 ‘반도체 억지력’은 급속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의 전쟁 위험성은 비례해 높아진다고 봐야 한다.
세계 1등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기업의 결단과 도전, 피나는 노력은 필수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수십조원을 투자하기 시작한 지금, 정부의 후원도 긴요하다. 지금 대선후보 중 반도체산업의 이런 엄중한 전략적 가치를 이해하고 뒷받침할 자세가 돼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
차병석 편집국 부국장 chab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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