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영의 걸어서 와인 속으로 - 스페인 '리베라 델 두에로'
새끼 양고기구이 '코르데로 아사도'
부드럽고 담백…촉촉한 육질 압권
와인 생산지를 다녀보면 기름진 땅도 있지만 거친 땅도 있다. 흥미로운 건 거친 땅의 포도가 더 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나무가 물에 닿기 위해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기 때문이다. 어렵게 자란 열매는 아름답고 강인한 와인이 된다.
스페인 고급 와인 생산지인 리베라 델 두에로(Rivera del Duero)는 메마른 고원지대에 있다. 이베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두에로 강만이 그 척박한 땅에 젖줄이 돼준다. 이곳에서 탄생한 와인은 그만큼 강렬할 수밖에 없다. 어느 와인 생산자는 “온실의 화초보다 야생의 들꽃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고통을 딛고 핀 야생화는 쉽게 시들지 않는다”고 비유했다.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 반드시 맛봐야 할 요리는 스페인식 순대 모르시야(morcilla)다. 프랜시스 케이스가 쓴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세계 음식 재료 1001에도 소개된 음식이다. 돼지 창자에 선지, 쌀, 채소를 넣는 것까지 한국식 순대와 같다. 차이점은 팬에 구워서 익힌다는 것. 입 안에서 바스락 부서지며 폭신하게 녹는 맛이 환상적이다. 눈을 감고 먹는다면 순대라는 걸 전혀 알 수 없을 정도.
스페인 토착 품종인 템프라니요(Tempranillo)로 만든 와인을 곁들이면 더 좋다. 짙은 레드 와인보다 장밋빛 로제 와인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다. 부드러운 터치와 신선한 산미가 고소한 모르시야를 잘 받쳐줄 테니까.
또 다른 추천 음식은 ‘코르데로 아사도(cordero asado)’라는 새끼 양고기구이다. 맛보는 순간 탁월한 부드러움과 담백함에 반할 것이다. 페이스트리처럼 바삭거리는 겉면과 촉촉하게 결이 살아 있는 육질이 압권이다. 노릿하고 쫄깃한 양고기를 기대한다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다. 양고기에는 근사한 레드 와인을 곁들여야 제 맛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 와인의 진수를 느끼고 싶다면 ‘세뇨리오 데 칼레루에가(Senorio de Caleruega)’라는 와인을 골라보자. 연간 5000병만 생산하는 와인인데 언필터드(unfiltered) 방식으로 제조한다.
와인은 보통 잔여물을 걸러내는 필터링 과정을 거치는데, 본연의 풍미를 잃지 않도록 이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와인은 거칠지만 고혹적이고 원색적이면서도 우아하다. 잔에 따르면 응축된 힘을 발휘하면서 기운이 넘쳐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그 와인이 생각나서 꺼내봤다. 와인 생산자는 기다렸다가 봄에 열면 폭발적인 힘을 보여줄 거라고 했다. 춥고 건조한 시기를 견뎌낸 와인이라고도 했다. 바야흐로 봄. 와인을 따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고통을 딛고 핀 야생화는 쉽게 시들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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