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류학 및 정신보건 석학 아서 클라인만 미국 하버드대 교수
사회적 고통은 혼자서 감당 못해, 그런데도 "견뎌야 한다"고 강요
공감능력 길러 서로 돌볼 수 있어야
[ 이미아 기자 ] “어느 사회건 수많은 낙인(stigma)이 있습니다. 가난과 늙음, 성별, 질병 등 여러 가지죠. 때론 사소한 행위가 낙인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고통받는데 드러내려고 하지 않죠. 하지만 숨길수록 문제는 더욱 커질 뿐입니다. 정신건강 관리는 더 이상 개인이나 가족 단위가 아니라 ‘사회적 돌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아서 클라인만 미국 하버드대 의료인류학 및 정신건강의학 교수(76·사진)는 지난 1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그는 “서양에서도 우울증 치료를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까지 100년 넘게 걸렸다”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도 ‘낙인 찍는 사회’에서 ‘서로 돌보는 사회’로 바뀌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당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들》을 비롯해 여러 저서를 쓴 클라인만 교수는 50여년간 의료인류학과 국제 정신보건, 중화권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 노인요양과 정신건강 관리에 대해 연구해온 세계적 석학이다.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그의 제자다. 이번에 연세대 초청으로 한국을 두 번째 방문해 14~16일 서울대와 연세대, 이화여대, 송도신도시에서 강연했다.
클라인만 교수는 ‘사회적 고통’과 ‘사회적 돌봄’ 차원으로 인간의 정신에 접근한다. 그는 “사회의 의미는 좁게는 자기 자신과 가족, 넓게는 국가와 지역, 인종, 세계로 볼 수 있다”며 “각 층위에 따라 사회적 돌봄의 개념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인생의 고통은 대부분 사회에서 비롯된 게 많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니까요. 생로병사부터 시작해서 가족과 사회구성원 간 갈등,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인한 트라우마 등 거의 모든 게 사회적 고통입니다. 이건 혼자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회에서 개인에게 ‘견뎌야 한다’고만 합니다.”
클라인만 교수는 “개인에게 함부로 뭔가 낙인 찍으려 하는 사회는 건강해질 수 없다”며 “성숙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돌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강조했다. 그는 “낙인은 인격을 말살하고,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상실시키며 개인을 사회에서 소외시킨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때로는 가족과 의료진마저 낙인 찍기의 주체가 돼 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나는 건강하다’는 믿음, 공감 능력 부족, 무경험에서 나온 무지 때문이죠. 특히 의료진과 간병인 등 ‘돌봄 제공자’가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위험합니다. 돌봄 제공자의 정신건강 교육과 관리가 중요한 게 이 때문이죠.”
10년 동안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2011년 세상을 떠난 부인의 이야기도 언급했다. 그는 “처음 아내가 병을 진단받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지만, 가족이 모두 한마음으로 아내가 적절한 사회적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아내는 하버드대 인류학과의 중국 부문 연구원이었습니다. 아내가 알츠하이머병 진단 사실을 통보했을 때, 하버드대에선 1년 동안 무상으로 학내 간호를 지원하며 아내의 은퇴 준비를 도왔습니다. 우리 가족도 그가 여전히 사회 구성원임을 일깨워주려 노력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 주민 역시 아내가 점점 기억을 잃어가도 예전처럼 그를 대했어요. 그 과정을 직접 겪으면서 사회적 돌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체감했습니다.”
클라인만 교수는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시간에 따라 변해 가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 “개인이 편안하게 사회적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 단위, 글로벌 단위로 협력해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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