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대 특허분쟁 유전자가위기술처럼
기초과학의 특허화·사업화 속도 빨라져
다양하고 수준 높은 기초연구 필요한 이유
염한웅 < 포스텍 교수·물리학 >
과학계 안팎은 새로운 유전자가위기술(CRISPR)을 둘러싼 특허분쟁으로 시끌벅적하다. 미국 MIT, 하버드대가 설립한 브로드(Broad)연구소와 캘리포니아대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수조원대의 이번 특허분쟁은 그 규모와 파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초과학과 경제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은 CRISPR로 알려진 DNA의 특이한 조각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은 1987년의 일본, 1993년의 네덜란드와 스페인 박테리아 연구자들의 기초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런 연구는 1960년대 이후 분자미생물학에 대한 많은 투자와 발전을 기반으로 한다. 이 DNA 조각의 역할을 이해하게 된 데에는 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 2007년께야 자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막으려는 박테리아의 면역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다시 수년간의 기초연구가 쌓인 뒤 2012년 스웨덴 우메아대와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공동연구진이 CRISPR을 이용해 DNA의 원하는 곳을 절단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때까지 CRISPR의 과학적, 경제적 파급효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논문도 120여건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실험실의 기초과학이었다.
이 기념비적인 업적이 알려진 뒤 수개월 만에 몇 그룹이 독립적으로 이 기술을 인간 DNA 조작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고, 곧이어 이 기술이 기존 유전자가위기술보다 월등히 우수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때는 이미 관련된 대다수의 연구자가 이 기술이 세상을, 최소한 유전자공학기술 전체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는 것을 깨달았고, 원천특허를 통해 시장을 선점하려는 경쟁을 시작했다. 작년 한 해에 발표된 관련 논문은 2100여편에 이른다.
유전자가위기술은 맞춤형 항암치료, 줄기세포치료 같은 의학기술을 포함해 각종 유전자조작 식물 및 가축, 신약 개발 등을 포함한 유전공학 전 분야의 핵심기술이다. 이 기술의 경제적 가치는 천문학적 수치가 될 수 있어서 이를 개발한 미국 대학의 연구자, 이들이 속하고 특허권을 갖게 되는 대학과 연구소, 이들이 세운 생명공학 벤처기업, 여기에 자금을 투입한 벤처캐피털, 이 기관과 기업이 고용한 특허법률법인들이 지금 이 순간 세기의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 사태에서 21세기 기초과학의 모습에 새삼 깨닫게 되는 점이 있다. 우선 시장에 이미 나온 새로운 혁신기술은 공통적으로 기초연구에 그 긴 뿌리를 대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특이한 점도 있다. 실험실의 기초연구성과와 돈이 되는 기술의 간격이 매우 좁아졌다는 것이다. CRISPR의 주요한 과학적 성과가 실험실에서 나온 것이 2012년과 2013년인데 2013년부터 특허화와 사업화가 이뤄졌다. 이것은 작금의 과학기술과 지식기반경제의 중요한 특징이다. 지금은 어떤 과학자라도 상업적인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내포한다면 자신의 업적에 대한 지식재산권을 주장하게 된다. 기초과학이 만들어내는 지식은 더 이상 공짜가 아닌 것이다. 인류 공동의 열린 지식으로 기초과학이 존재하고 공짜로 활용해 사업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혁신적인 신기술에 기반해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려면 창의적인 기초과학이 필수적인 이유다. 물론 기초과학을 통한 혁신에는 긴 시간과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며 그것이 경제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될 확률도 낮다. 기초과학의 새로운 발견이 어디서 나올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2012년의 놀라운 발견이 있은 뒤 미국 최고의 대학과 연구소들의 생명공학자가 이 기술의 잠재력을 이해하고 이를 실용 가능한 기술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수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 연구 중심 대학의 역량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양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초과학자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혁신기술로 이어질 발견을 할 것이며 이를 이른 시일 안에 사업화하려 해도 이들이 필요하다. 이들의 과학적 상상력 속에 미래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염한웅 < 포스텍 교수·물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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