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수공업 방식의 면세점 선정
모든 이가 잠재적 범죄자가 될수도
“한국 자본주의는 여전히 수공업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헌재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말이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는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 재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알 수 있을 것 같다. 경제의 특정 영역을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는 손이 지배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권력이 시장위에 올라설 수 있는 배경이다.
이 방식이 효율적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 시대는 끝났다. 이 방식이 산업과 경제, 나아가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면세점 허가를 보며 든 생각을 정리해 본다.
◆박정희 방식의 경제의 그림자
이명박 정부 때 미소금융을 잠깐 생각해보자. 정부는 대기업과 은행 등의 팔을 비틀어 돈을 내라고 했다. 공정사회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댔다. 그렇게 한국형 마이크로크레딧이 탄생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대기업과 은행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아니었다. 한국의 기업인들은 정부에 밉보이면 해코지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돈을 냈다. 사회공헌조차 정부주도형이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미소금융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박근혜 정부는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열었다. 그 방식은 더욱 퇴행적이었다. 대기업에 지역별로 할당했다. 삼성은 대구, 현대자동차는 광주, 한진은 인천 등에 세웠다. 이 정부 임기가 끝나면 대기업의 부동산 투자로 귀결될 게 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왜 이 두 명의 대통령은 이런 일을 벌였을까. 사람은 자신이 보고 배운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을 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박정희 정권 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대그룹에서 일하며 수공업 자본주의를 몸소 경험했다. 정부가 개발연대의 주역이었다. 정부가 현대그룹은 중공업, LG그룹은 전자, 한진그룹은 항공 등을 나누는 것을 봤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배웠다. 대기업에 사업을 배분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고. 물론 요즘 나오는 얘기를 보면 아버지로부터 단순히 배운 게 아니다. 어릴때부터 본인이 직접 그 짓을 했다. 최태민 일가와 자신을 위해 기업들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을 특검이 수사를 시작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무서울 것 없이 폭주했다. 그 결과는 탄핵이었다. 지금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변호인을 통해 나오는 얘기를 보면 그렇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짓에 비하면, 대통령이 된 후 대기업들을 상대로 벌인 일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모든 범죄행위를 부인하는 이유다. 이는 단순히 법망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죄를 짓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게 현실적 해석이다. 비도덕을 뜻하는 ‘amoral’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부도덕을 뜻하는 ‘immoral’과는 의미가 다르다. 부도덕한 사람은 자기가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도덕성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은 이를 따지지도 않는다. 대통령은 아마도 amoral 상태일 것이다.
◆수공업 방식의 면세점 선정
오랜 기간 서울 시내 면세점은 롯데면세점, 신라면세점, 워커힐면세점, 동화면세점 체제였다. 이중 롯데는 3곳의 면세점 면허를 갖고 있었다. 이 판이 흔들린 것은 지난 2015년이다. 대략적인 일지만 봐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2015년 1월18일 관세청이 서울에 면세점 3개를 추가로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면세점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해 7월10일 발표된 1차 면세점 대전의 승자는 한화와 호텔신라였다. 호텔신라는 현대산업개발과 손잡고 HDC신라라는 법인을 만들어 용산 면세점 사업권을 따냈다.
1차 면세점 대전이 한창이던 2015년 5월29일. 관세청은 서울 시내 면세점 3곳(롯데의 월드타워점, 롯데의 소공점, SK의 워커힐점)을 운영할 사업자를 새로 선정한다고 공고를 냈다. 5년인 면허 기간이 만료돼 사업자를 다시 뽑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공고가 면세점 업계를 격랑으로 몰아넣게 된다. 추가선정과 달리 기존 사업자의 권리를 빼앗아 다른 사업자에게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사업을 하던 롯데와 SK는 사업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두산 신세계 등은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경쟁에 뛰어들었다. 재밌거나 또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각 기업들이 상생기금을 내고, 정부가 조성하는 청년희망펀드 등에 돈을 내겠다고 잇따라 발표했다. 사회공헌 상생 약속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11월14일 발표가 임박하자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한 기부 행렬이 이어졌다.
△10월29일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ㆍ임원, 청년희망펀드 100억원 기부
△11월1일 최태원 SK그룹 회장, 청년희망펀드 60억원 기부
△11월5일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청년희망펀드 30억원 기부
△11월11일 신세계 이명희 회장ㆍ정용진 부회장, 청년희망펀드 100억원 기부
누가 봐도 알수 있다. 면세점을 지키기 위해, 면세점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면세점과 전혀 관계없는 정부 프로젝트인 청년희망펀드에 돈을 내는 것을. 수공업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 시간이었다.
◆비리의 함정
결국 11월14일 일이 벌어졌다. 승자는 두산과 신세계였다. 패자는 롯데와 SK였다. 롯데는 잠실롯데월드타워점 면세점 사업권을 빼앗겼다. SK는 수십년 해온 워커힐 면세점을 내놓아야 했다. 신세계는 유통이 중심인 기업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두산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왔다. 두산의 면세점 사업권 획득을 놓고 이상한 루머들도 돌았다.
그리고 많은 롯데와 SK 면세점 직원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했다. 롯데면세점 노조는 고용을 보장해달라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면세점 제도 개편에 대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다. 사업권을 딴 기업들은 더이상 허가를 내주면 안 된다고 부딪쳤다. 엉망진창이었다.
2016년 4월29일 정부는 수많은 파장을 몰고 올 방침을 발표한다. "서울 면세점 4곳(대기업 3곳, 중소중견기업 1곳)을 허용하겠다."
중소중견기업을 제외하면 대기업 3곳은 누구나 알만했다. 사업권을 빼앗긴 롯데와 SK, 그리고 유통 대기업중 면세점 사업을 하지 않고 있는 현대백화점 등이었다. 업계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은 면세점 정책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대부분 세 곳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대기업들은 최순실을 돕고, 정부는 그 대가로 대기업의 각종 민원을 들어줬다는 프레임이 설정됐다. 롯데와 SK가 돈을 내고 받게 될 것은 면세점 사업권이고, 삼성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국민연금의 지원이라는 얘기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인식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원래 믿으려 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구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부도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롯데 SK 현대백화점을 다 주면 앞서 설명한 프레임이 그대로 적용돼 파장이 커질 것이 뻔했다. 발표가 임박하며 원래 예상했던 롯데 SK 현대백화점으로 가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그러면 남는 후보는 호텔신라와 신세계였다. 누가 빠지고 누가 들어갈 것인가가 관심이 됐다.
12월초 그럴듯한 전망이 나오고 시작했다. 롯데 SK중 한 곳, 덜 부담스러운 SK가 탈락할 것이란 얘기가 많았다. 그럼 누가 그 자리에 들어가냐는 문제가 남는다. 호텔신라는 삼성그룹 계열사라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됐다. 롯데 현대백화점 신세계가 추가로 면허를 획득했다.
◆정책의 신뢰성
이런 박정희식(수공업적 방식) 경제운용의 문제점은 다양하다.
우선 비리 가능성이다. 정부가 허가권을 쥐고 있고, 기업은 정부에 잘못 보이면 큰 사업을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비선실세라고 누가 접근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그의 웬만한 요구에는 응할 수밖에 없다. 왜 버티지 못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다. 비즈니스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미국처럼 로비제도가 갖춰 졌을때 가능하다. 미국 자본주의는 이런 제도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비즈니스에 도덕성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이 고안해 낸 것은 로비의 합법화였다.
정리하면 이렇다. 면세점 사업은 기업의 성장과 정체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그래서 꼭 사업권을 따야 한다. 하지만 로비의 길은 막혀 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의 실세가 돈을 요구한다. 이것이 롯데와 SK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들의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낸 것은 사업권에 대한 대가로 보기는 힘들다. 그저 남들 다하는 것처럼 보험을 들어둔 것 뿐 아닐까. 뇌물죄 여부는 물론 특검이 가려야할 몫이지만.
두번째 문제점은 정책의 혼선이다. 시장은 인간이 개발한 제도지만, 인간이 운용하는 것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 감정과 로비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경제보다 시장경제가 오래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수공업 방식은 인간의 힘과 의지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 힘에 따라 정책이 움직이면 일관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세번째는 정부의 신뢰도 추락이다. 3차 면세점 발표를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게 몇 가지 있다. 정부는 현대백화점이 보세화물관리 시스템 적정성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면세점 업계 관계자는 “보세화물 관리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현대백화점은 그동안 면세점 사업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밖에 관광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력정도, 중소기업 지원방안의 적정성, 경제사회발전 기여도, 기업이익의 환원정도, 상생협력을 위한 노력정도 등의 항목 등도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시장이 문제를 일으키면 정부가 나서서 이를 수정해야 한다. 헌법에 나와 있는 정부의 역할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부가 나서서 시장을 쥐락펴락 하는 것은 헌법과도 배치된다.
1987년 개헌하면서 국회는 119조를 수정했다. 논란이 되는 경제민주화 조항은 119조2항이다. 그 앞에 1항은 이렇게 돼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국민경제의 주체로 기업을 넣은 이유는 박정희식 경제체제, 수공업적 경제운용의 종언을 고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후 다시 개헌 얘기가 나오는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한국경제 곳곳에는 지금도 보이는 손이라는 유령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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