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대 부지로 도청사 이전하면
신축에 드는 혈세 수천억 절감 가능
명분·실리 두 마리 토끼 잡는 선택을
정찬민 < 용인시장 >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치려고 할 때의 일화다. 유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항우를 치러 가던 차에 한 시골 촌로가 유방에게 “군사를 출동할 때 명분이 없다면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며 명분을 쌓도록 조언했다. 항우가 자신의 군주를 쫓아내고 죽였으니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보다 천하의 역적이라는 것을 제후들에게 알리고 죽은 군주를 위해 애도하라는 것이다. 유방은 한낱 이름 없는 촌로의 말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여 실행했다. 그 결과 여러 제후에게 도덕적 명분을 쌓을 수 있었고 여러 제후도 유방을 도왔다.
한나라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의 ‘공자세가’ 편을 보면 ‘君子爲之必可名(군자위지필가명)’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군자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명분에 부합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자로에게 명분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했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으며 결국에는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고 했다.
최근 용인시가 옛 경찰대 부지로 경기도청사 이전을 제안한 것을 놓고 논란이 많은 것 같다. 도청사 예정지인 수원 광교 주민들은 “이미 주민과의 약속을 바탕으로 내년에 착공하기로 돼 있다”고 반발한다고 한다. 경기도 관계자도 “신청사 이전이 10년 이상 진행됐고 협약까지 한 상태이기 때문에 검토 여지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충분히 이해되고 반대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약속이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인시의 주장에도 또 다른 명분이 있다. 수천억원에 달하는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는 명분이다. 용인시는 최근 옛 경찰대 부지에 뉴 스테이를 짓는 조건으로 LH(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8만2645㎡에 달하는 부지와 시설을 무상으로 넘겨받기로 했다. 이 부지 활용 방안을 놓고 고심하던 차에 경기도 신청사를 이곳으로 이전하면 엄청난 예산을 절약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경기도가 광교에 지을 예정인 신청사에 들어갈 예산은 5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옛 경찰대 부지는 대학 캠퍼스로 사용하던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만 하면 가능하기 때문에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을 쓰지 않아도 된다. 절감된 재원은 1300만 경기도민의 복지와 균형발전을 위해 사용하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싶다. 뒤늦게 제안한 것은 이 같은 좋은 조건이 최근에야 결정됐기 때문이다.
용인시는 2005년 완공한 신청사를 둘러싼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 호화청사라는 비난을 받은 것이다. 청사를 짓는 데 2000억원의 혈세를 들였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필자가 취임한 이후 청사 내에서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벌인 것도 호화청사란 오명을 벗기 위해서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지었으니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용인시가 도청사 이전을 제안한 것도 이 같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용인시의 제안에 반대하는 측도 충분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용인시의 제안도 국민 혈세 절감이란 명분이 있다. 단지 용인시 제안이 좀 더 실리와 명분을 찾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양측의 명분 싸움에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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