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뜯기고 수사 받고 여론 눈총 '최순실 불똥' 속앓이
기업들 "의혹 규명 당연하지만 빨리 일할 분위기 돼야"
"청와대 요청에 774억 냈는데 범죄자 취급…또 기업이 희생양 되나"
53개사 관계자 줄소환 시작
"국세청·공정위·검찰 등 사정기관 업은 정권 요구
거부할 기업 몇이나 되나"…적자 기업도 마지못해 돈 내
"돈 낸 대가로 특혜 받았다"…여론의 오해도 곤혹스러워
정부 과도한 규제권한 줄여야 강제적 준조세 근절돼
[ 김현석 / 박한신 / 도병욱 기자 ]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사건의 불똥이 재계로 튀면서 관련 기업들이 냉가슴을 앓고 있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774억원을 출연한 53개 기업 관계자의 검찰 줄소환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은 청와대 요청에 마지못해 거액을 헌납하고도 마치 범죄자인 양 수사를 받게 됐다. 그 대가로 특혜를 챙긴 것 아니냐는 여론의 따가운 눈총까지 받고 있다. “돈 뺏기고, 검찰수사 당하고, 정경유착 의심까지 받는데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게 재계 고위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이 관계자는 “최순실 스캔들이 해외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면서 관련 기업들은 브랜드 가치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고 있다”며 “철저한 수사로 의혹은 규명하되 기업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빨리 조성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3일 삼성 미래전략실 김 모 전무를 참고인으로 소환해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에 대해 조사했다. 현대자동차 관계자 등도 이날 불려 나왔다. 검찰은 다음주 초까지 두 재단에 출연한 53개 기업 관계자를 차례로 불러 전수 조사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대통령 선거자금 수사 이후 가장 많은 기업이 검찰 조사를 받는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기업 총수의 소환 조사도 불가피하다는 말까지 나와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작년 7월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지원기업 대표 오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행사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 17명 중 7명을 따로 독대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체육·문화 진흥이라는 좋은 취지와 대통령 관심사라는 말, 실세 경제수석의 협조 요청을 모른 체할 수 있는 기업이 있겠느냐”며 “대부분 기업은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 검찰 등 사정기관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두 재단에 돈을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SK, 롯데, 한화, CJ 등 오너가 수사받거나 옥살이를 한 곳이 미르·K스포츠재단 외에 많은 정권 사업에 더 많은 돈을 낸 것도 그 때문이다. 두 재단에 돈을 출연한 53개 기업 중엔 지난해 적자를 낸 곳도 12개 기업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기업들이 공공연히 하긴 어렵다. 어떤 정치적 보복이 따를지 몰라서다. 이 때문에 검찰 소환을 앞둔 기업 관계자들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누군가는 진실을 얘기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치 리스크에 기업들 ‘시계 제로’
승마협회 회장사를 맡고 있는 삼성전자는 곤혹스러운 처지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를 위해 180억원대의 지원계획을 세우고 35억원을 집행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어서다. 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지 않았고, 아직 뚜렷한 증거도 없지만 인터넷 등에선 ‘삼성이 정유라를 지원하고, 그 대가로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떠돈다.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한 늑장 수사로 코너에 몰린 검찰이 삼성을 희생양 삼아 국민들의 공분을 달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마저 나온다. 삼성은 “검찰 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며 “수사를 거쳐 모든 의혹이 투명하게 밝혀졌으면 한다”고 했다.
주요 기업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소환조사는 글로벌 영업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기업이 마치 부패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보도되고 있어서다. 일부 외신은 ‘갤럭시노트7 발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삼성전자가 대통령 관련 희대의 스캔들에도 엮여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다.
커지는 국내 정치 리스크는 주가 환율 등 경제 전반의 불안 요인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국 불안이 이어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져 기업들은 내년 사업·투자계획 등을 제대로 세 裡?못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달 말 30대 그룹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48.1%가 ‘내년 사업계획의 초안도 짜지 못했다’고 답했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재판을 걱정해야 하는 이 시기에 기업마저 흔들린다면 큰일”이라며 “수사를 빨리 마무리해서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더 이상 기업을 정치판의 희생양이 되게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투명경영으로 준조세 막아야
정권의 관심 사업에 기업들이 갹출당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박근혜 정부만 해도 기업들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낸 774억원 외에 청년희망펀드에 880억원, 지능정보기술연구원에 210억원, 한국인터넷광고재단에 200억원, 중소상공인희망재단에 100억원 등을 내놨다. 또 창조경제혁신센터 17곳 중 15곳을 대기업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기업의 팔을 비트는 준조세를 근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따지고 보면 기업도 최순실 사태의 피해자”라며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경유착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정경유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정부의 규제 등 권한이 막강하기 때문”이라며 “규제 철폐 등 기업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정경유착 폐해를 없애는 첩경”이라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경영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금과 같은 위험요소를 관리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김현석/박한신/도병욱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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