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고용 사장' 장관
청와대에 혼나고 국회서 깨지고
험난한 청문회 과정 거쳐 장관 된 뒤에도 가시밭길
청와대·국회에 수시로 불려가 공개면박 당하고 질책 받고
소신 펼치고 싶어도
독립적인 정책결정 어렵고 인사권도 행사하기 힘들어
'국정동반자' 위상 허울만
[ 이상열 / 김주완 기자 ]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쥐고 있는 중요한 자리다. 자기 확신과 소신이 확실해야 한다.” “모든 것을 정면승부한다는 생각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신감이 없으면 아예 맡지 말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8월 행정안전부(현 인사혁신처)는 ‘장관 가이드’란 책자를 발간했다. 여기엔 ‘일 잘하는 장관, 신뢰받는 장관’이 되는 데 필요한 업무 자세가 선배 장관들의 조언 형식으로 실려 있다. 부처의 최고 의사결정자이자 국정운영을 책임지는 국무위원으로서 선배 장관들의 자부심과 결기가 생생하게 묻어난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이 책자는 지금까지도 새 장관이 임명될 때마다 대통령이 임명장과 함께 주는 선물로 활용되고 있다.
‘장관 가이드’를 읽는 요즘 장관들의 심정은 어떨까. 선배 장관들의 결기는 그야말로 ‘과거완료형’일 뿐이다. 장관의 ‘주가’는 한참 추락했고 대통령과 함께 내각을 이끌어가는 ‘국정 동반자’로서의 위상은 옛날 얘기가 됐다. 관가 일각에선 “정해진 임기도 없이 한시 고용된 최고경영자(CEO)나 다름없다”는 푸념마저 나올 정도다.
◆0.004% 확률 뚫고 장관 됐지만…
전체 중앙 공무원(62만5835명) 대비 장관 수(장관급 포함 31명)로 따지면 장관이 될 확률은 0.004%다. 그만큼 장관 되는 길은 험난하다. 관가에선 “장관 중에 행정고시 수석 한 사람 드물다”는 말이 농담처럼 돌아다닌다. 실력만으로 장관이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이른바 ‘관운(官運)’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건 개각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일 아침까지 모 부처 장관으로 내정 통보된 사람이 발표 직전 바뀌는 사례도 있다.
장관으로 내정되더라도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인사청문회 스트레스가 특히 만만치 않다. 과도한 재산 축적과 과소비, 위장전입, 세금 신고 누락,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등 온갖 의혹이 무차별적으로 제기돼 죄인 취급 당한다. 체면과 자존심을 다 구기고 나면 이미 장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의욕마저 꺾인다.
◆청와대에 치이고, 국회에 혼나고
가까스로 장관에 취임하더라도 가시밭길은 끝이 없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청와대 참모들에게 질책당하고 국회에 수시로 불려가 호통을 듣기 일쑤다.
2014년 3월20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 토론회. 전 국민에게 생중계된 토론회에서 주요 부처 장관들은 돌아가면서 대통령의 공개 질타를 받았다. 윤상직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각종 인증제도의 홍보 부족으로,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은 90여개 규제 개선 지연 문제로,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콘텐츠 분야 양극화 해소 대안 부재로 면박당한 것. 해당 장관들은 이 일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후문이다.
국회 국정감사, 대정부 질의는 물론이고 각종 특별위원회(특위)에 불려다니는 것도 장관들에겐 큰 스트레스다. 세금, 전기료 등 여론이 민감해하는 이슈에 소홀히 대응했다가 언론에 두들겨맞는 건 기본이다. 정치인 출신으로 장관까지 지낸 전직 국회의원은 “장관이 되고 나니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국민에게 사과, 대통령에게 사죄, 그러고 나서 사퇴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 토로했다.
◆인사권도 없는 ‘허수아비 장관’
장관의 ‘영(令)’은 인사권에서 나온다지만 인사권을 가진 장관은 없다. 장관에겐 산하기관장 추천권만 있을 뿐 임명권은 청와대가 독점한다.
장관이 1순위 후보로 추천한 인사마저 최종 낙점 과정에서 후순위로 밀려나는 일도 다반사다. 기관장 인사권이 없으니 부처 내 1급 이상 고위공무원의 인사 숨통을 터줄 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인사를 잘 푸는 실세 정치인 출신 장관이 역대 장관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는 부처까지 나올까.
현 정부 들어 다시 도입된 부총리 제도도 겉돈다는 평가다. 경제부총리는 그나마 막강한 예산 권한이 있어 관련 부처를 통솔할 수 있지만 ‘돈줄’이 없는 사회부총리는 사회 관련 부처에 ‘말발’이 서지 않는다.
이상열/김주완 기자 mustaf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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