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사위님은 곡을 자주 써서 만인이 부르는데 나도 그런 노래를 하나 남겼으면 해요.” “좋습니다. 시가 있습니까?” “음….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시가 마음에 든 28세 청년 음악가 금수현은 즉석에서 가락을 적어갔다. 15분 만에 곡이 완성됐다. 한국인이 즐겨 부르는 가곡 ‘그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주옥같은 노랫말은 그의 장모이자 소설가인 김말봉 여사가 붙였다. 1947년 일이다.(금수현, ‘나의 시대 70’)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려는 민족적 열기로 들끓었다. 작곡가 금수현도 그 한복판에 있었다. 광복되던 해 경남여고 교감으로 간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말로 된 음악교육을 하고 싶었다. 작은 악전(樂典)을 하나 만들어 음악말이라 이름 붙였다. 고음부기호를 높은음자리표, 강약을 셈여림, 소절을 마디 등으로 바꿨다. 당시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국장으로 있던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는 이 책을 보고 “내 생각과 똑같다”며 그를 음악용어제정위원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한글 사랑’의 실천가였다. 경남여고 재직 시절 교직원 18명 가운데 절반이 김씨였다. 누군가 “김 선생”하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고심 끝에 그는 이름을 김수현에서 한글 ‘금수현’으로 바꿨다. 자식 이름도 순한글로 지었다. 그의 아들인 지휘자 금난새 씨는 과거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이름이 ‘하늘을 나는 새’라는 뜻이라며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이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문교부 편수관 시절 음악용어를 정하는데, 리듬과 장단을 두고 논쟁이 붙었다. 투표까지 간 끝에 한 표 차이로 리듬이 채택됐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금수현은 슬그머니 리듬과 장단을 함께 쓰도록 용어집에 넣었다. 토박이말 ‘장단’이 살아남은 배경이다. 장단을 한자말로 알고 있는 이가 많지만 순우리말이다. 한자로 ‘長短’이라 하는 것은 억지로 가져다 붙인 말이다. 도돌이표를 비롯해 큰북, 작은북, 으뜸음, 버금딸림음 등 눈에 익은 수많은 음악용어가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널리 퍼졌다.
“꾸밈음이란 알맞은 우리말이 생겼는데 구태여 裝飾音(장식음)이라고 해야 권위가 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국어학자의 따끔한 일침 같은 그의 지적은 지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국경제신문은 1992년 9월1일자에서 금수현 선생이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제가 24주기였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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