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감사 분리선출
대주주 의결권 3%로 제한…이사 선임 영향력 대폭 줄어
투기자본은 '지분 쪼개기'로 의결권 제한 피할 수 있어
집중투표제 의무화하면 이사 절반 이상이 넘어가
적대적 M&A에 쉽게 노출
[ 장창민 기자 ] 대기업마다 경영권 방어에 비상이 걸렸다. 야당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기업 사내외 이사진을 구성할 때 대주주 의결권은 대폭 제한되는 반면 국내외 펀드와 소액주주의 권한이 크게 강화돼서다. 사내외 이사 자리 절반 이상이 투기펀드나 소액주주에 넘어가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될 것으로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SK LG GS 등은 상법 개정안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대주주 발목 잡는 상법 개정안
야당이 잇따라 내놓은 상법 개정안은 크게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전자투표제 △사외이사 규제 강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제도는 대부분 상법과 시행령에 따라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을 규제 대상으로 하고 있다. 151개 상장사(지난해 말 기준)가 상법 개정안의 영향을 받는다.
개정안은 기업의 감사위원회 위원이 되는 이사를 다른 일반 이사들과 분리해 선임하도록 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대주주는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분리 선출하는 단계부터 3%로 의결권이 제한된다. 이렇게 되면 이사진 선임 과정에서 대주주의 영향력이 대폭 축소된다. 지분 쪼개기(3% 이하)를 통해 의결권 제한 규정을 피할 수 있는 투기자본은 기업 경영권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커진다.
집중투표제도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다. 두 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당 이사 후보자 수만큼 의결권을 줘 특정 후보에게 ‘몰아주기’식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투기자본이나 소액주주가 힘을 합쳐 사외이사로 진출하는 길을 틀 수 있다.
지주사, 경영권 방어 더 취약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집중투표제가 함께 적용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두 제도가 결합하면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은 경영권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SK LG GS 등 지주사들은 큰 위협에 놓이게 된다. 일반적으로 주요 그룹은 몇몇 계열사를 통해 주요 기업의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하지만 지주사들은 지배 체제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계열사를 대신해 지주사가 주요 기업의 지분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이 원안대로 시행되면 이런 지주사 체제가 경영권 방어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지주사에 집중된 지분의 의결권이 모두 3%로 제한돼서다.
2004년 LG그룹에서 독립하면서 지주회사 체제로 탈바꿈한 GS그룹을 예로 들어 보자. 지주사인 (주)GS는 GS리테일의 지분 65.75%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는 의결권 행사 지분이 3%로 제한된다. 마찬가지로 6.78%의 지분을 갖고 있는 국민연금도 3%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반면 분산된 외국인투자자(7.48%)와 소액주주(18.93%) 지분은 그대로 의결권을 갖는다. 이런 불합리한 구조는 지주회사 체제인 SK LG 같은 그룹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사 과반수 투기꾼에 넘어갈 수도
집중투표제까지 시행되면 기업 경영권 방어는 더 어려워진다. 이사 네 명을 뽑을 때 한 주를 가진 주주는 네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소액주주들은 자신이 원하는 후보 한 명에게 네 표를 모두 몰아줄 수 있다. 이철행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이사 네 명을 새로 선임한다고 가정하면 외국계 펀드와 기관투자가는 주주제안을 통해 이사 후보를 제안할 수 있다”며 “계산상 지분 20%+1주를 확보하면 원하는 사람을 최소 한 명 이상 이사로 선임하는 게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이 팀장은 “결국 이사회가 7명으로 구성된 회사라고 가정하면 최소 4명(감사위원 분리선출 3명+집중투표제 1명)을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로 선임할 수 있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재계에선 다중대표소송제도 기업 경영을 뒤흔들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모회사 주주는 자회사 경영진을 대상으로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다중대표소송제가 국회를 통과할 경우 국내 상장사 대부분이 소송 대상이 될 것으로 분석됐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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