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우리은행 지점장도 가담
가짜 매출 신고서로 대출…'기한 후 신고제' 등 허점 악용
세무서·무역보험공사도 속아
'돌려막기' 대출 등 편의제공, 뇌물 받은 은행 임직원 구속
[ 황정환 기자 ] 페이퍼컴퍼니(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를 매출 수십억원의 수출기업으로 둔갑시켜 시중은행 8곳에서 170억원가량의 불법 대출을 받은 일당이 구속기소됐다. 대출 사기극에는 대출브로커뿐 아니라 국민·우리은행 지점장까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 5월26일자 A1면 참조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금융조사1부(부장검사 서봉규)는 30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등의 혐의로 대출사기범 안모씨(41), 원모 우리은행 지점장(48) 등 21명을 구속기소하고 대출 브로커 등 9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8개 은행에서 170억원을 대출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사기범과 대출브로커, 은행 임직원 사이의 검은 고리가 적발됐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한 신종 대출 사기로 규정했다. 피의자들은 폐업 상태 페이퍼컴퍼니 10곳을 각각 5000만~1억원에 사들였다. 이들 페이퍼컴퍼니는 세무·회계법인을 통해 과거 3년치 재무제표를 세탁한 상태였다. 은행권에서 대출받으려면 3년간의 재무제표가 필요하다.
거짓으로 꾸며낸 실적을 세무서에 신고해 대출에 필요한 표준재무제표증명서 등의 서류를 발급받았다. 법정 신고기간이 지난 뒤에도 과세표준신고서를 낼 수 있도록 한 ‘기한 후 신고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세무서는 실적 신고 2개월 뒤 세금납부고지서를 발송하기 전까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대출 필요 서류를 발급해준다.
영세율이 적용되는 수출 실적은 세금계산서 발급 의무가 면제돼 세무서 신고 때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악용해 페이퍼컴퍼니를 수출기업으로 둔갑시켰다. 수출기업에 지급보증서를 발급하는 한국무역보험공사는 가짜 수출신고에 속아 수출신용보증서를 발급했다. 검찰 관계자는 “세관에서 확인한 페이퍼컴퍼니들의 수출 실적은 전무했다”며 “기관들이 세관에만 확인했어도 불법 대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대출브로커와 은행 임직원도 가담했다. 브로커는 대출금의 10~30%를 알선료로 받은 뒤 은행 임직원에게 금품을 줬다. 우리은행 지점장은 7억원을 대출해주고 2억45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국민은행 지점장은 페이퍼컴퍼니 대출이 연체되자 새로운 페이퍼컴퍼니를 상대로 돈을 빌려줘 대출금을 변제하도록 하는 ‘돌려막기’ 대출을 승인했다.
검찰 관계자는 “‘유령회사’의 허위 신고만으로 각종 증명서를 발급받아 대출받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현 제도에 문제가 있다”며 “세무서와 세관, 금융회사 간 공조를 통해 대출 때 실적 심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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