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기완 기자 ] 미소공동위원회 1년 만에 해체
미소공동위원회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입니다. 그런데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1월에 구성돼 1년여 만에 끝내 깨지고 말았습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소련과 함께 한국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947년 9월 UN 사무총장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소련은 강력하게 반대했지요. 하지만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안이었던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UN에 넘겼습니다.
미국은 UN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미국은 남북한의 인구 비례에 따라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안에도 소련은 반대했습니다. 당시 남한 인구는 북한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인구 비례로 국회의원을 뽑으면 임시정부 국회는 남한의 영향 아래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한 것입니다.
UN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정기 총회에서 다루기로 했습니다. 1947년 11월14일, UN 총회는 다음과 같은 한국 통일안을 43 대 9(기권 6)로 통과시켰습니다.
① 남북한 전 지역에서 UN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선거로 국회를 구성한다.
②그 국회가 남북에 걸친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
③선거를 감시하고 준비하기 위해 UN한국임시위원단(이하 UN위원단)을 구성한다.
④통일 정부가 만들어지면 90일 이내에 남북한에서 미국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철수한다.
남한내 좌익 폭력투쟁
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1948년 1월 UN위원단이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지요. 소련이 UN위원단의 방문조차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2월 말 UN 소총회는 UN위원단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역, 즉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시행하라고 결의했습니다. 결국 1948년 5월10일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기로 했습니다.
남한 좌익들은 UN위원단의 활동을 막기 위해 격렬한 시위와 파업,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대표적인 폭력 투쟁은 이른바 ‘2·7 구국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변전소를 파괴하고 전기와 전화선을 잘라버렸습니다. 기관차를 부숴 철도 운행을 방해하고 경찰 지서를 습격해 불을 지르기도 했지요. 2·7 구국 투쟁은 2주간이나 계속돼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편 남한의 우익 진영은 UN 총회의 결의를 크게 환영했습니다. 임시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던 이승만은 물론 다른 정당을 이끌던 김구와 김규식도 환영했습니다. 김구는 “소련의 거부로 남한만의 선거가 될지라도 그 정부는 법적 이치로나 국제 관계로 보나 통일 정부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1947년 12월 김구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입장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남한만의 선거에는 절대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소련이 반대하는 총선거는 치르지 말자고 UN위원단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은 2·7 구국 투쟁이 한창이던 2월 중순, 남북 정치 지도자 회담을 제안하는 편지를 북한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아무런 답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 달도 더 지난 뒤 북한의 김일성이 회의를 열자고 제의해왔지요. 남북한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평양에 모여 남북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이미 인민군 창설
북한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기 전인 2월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했고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했습니다.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회의하자고 하면서 실제로는 이미 자기들만의 정부를 만든 셈입니다. 김일성에게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남한의 지도자들과 협의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만 남한의 단독정부가 민족 통일을 방해한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 협상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가기로 했습니다. 김구는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며 평양을 향해 떠났습니다.
평양에서 ?남북 협상은 북한 정부가 준비한 각본대로 진행됐습니다. 회의는 미국과 이승만 등 우익 정치인에 대한 비난, 소련과 북한의 입장 선전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남쪽 대표들은 자유롭게 발언도 할 수 없었지요.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5·10총선거를 거부했습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지요. 김구는 일제 강점기 임시정부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철저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1948년 8월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뒤에도 UN 감시 아래서 남북한 총선거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6월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범인은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한독당 당원 안두희 소위였습니다.
글 =황인희/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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