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만큼 음식에 잘 어울리는 술은 없습니다. 치맥(치킨+맥주)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기름기 많은 음식에 탄산이 많은 라거가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9일 서울 삼성동 라마다호텔에서 만난 한국인 1호 공인 시서론 손봉균 셰프는 “맥주를 잘 골라 마시면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시서론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맥주전문가 자격증 제도다. 와인 소믈리에처럼 맥주 자체의 맛을 평가하고 궁합이 맞는 음식을 추천해준다. 손 셰프는 한국인 최초로 이 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한국인 공인 시서론은 손셰프를 포함해 3명밖에 없다.
손 셰프는 일반적으로 음식을 먹을 때는 탄산감이 적은 브라운에일이나 레드에일이 좋다고 추천했다. 맥아향이 풍부해 음식의 맛과 향을 더해준다는 이유에서다. 매운 음식에는 맥아를 구운 뒤 한번 더 볶아 향이 진한 다크라거가 잘 어울리고, 기름기가 많은 음식엔 향이 진하지 않고 탄산이 풍부한 라거가 적합하다고도 했다.
맥주는 차갑게 마시는 것이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종류에 따라 맛있는 온도가 다르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맥주는 발효되는 온도에서 제일 향이 풍부해 맛있다”며 “라거는 4~7도, 에일은 9~13도 정도로 마시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컴퓨터만 알던 ‘공돌이’, 셰프를 꿈꾸다
손 셰프가 처음부터 맥주에 관심이 있었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그는 2008년 대기업에 입사했다. 다른 대학 동기들처럼 엔지니어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회사를 다닌지 1년째 되던 해 슬럼프가 찾아왔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하며 한달간 사내에서 롤모델을 찾았다. 손 셰프는 “회사를 계속 다녀서 대리, 과장, 부장이 된다고 할 때 닮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며 “한살이라도 젊을 때 꿈을 이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꿈은 요리사였다. 학생 시절 친구들이 ‘손장금’으로 부를 만큼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반대했다. 회사가 싫으면 그냥 여행이나 다녀오라며 그를 설득했다. 그는 2010년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으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세계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CIA를 찾았다. 입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성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개조한 학교에 학생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강의실 안에선 다양한 인종의 학생들이 저마다의 요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뛰고, 나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그는 앞으로의 목표와 지금의 상황, 미래의 청사진 등을 담을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다. 이 자료를 들고 부모님을 찾아가 발표형식으로 설명했다.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도면으로 그리는 공대생 버릇을 못고친 거죠. 결국 부모님을 설득해 2011년 CIA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셰프 지망생, 맥주와 사랑에 빠지다
요리를 배우는 일은 재미있었다. 하루 12시간 이상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 혼자서 요리를 다시 할 정도였다. 기숙사 지하에 있는 주방에서 밤 ?새며 새로 배운 요리를 직접해봤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입학은 어렵지 않지만 졸업이 쉽지 않은게 CIA의 특징이다. 함께 입학한 동기 20명 중 한번도 F를 받지 않고 제때 졸업한 사람은 손셰프를 포함해 5명에 불과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요리는 미국식 바비큐였다. 미국식 바비큐는 크게 자른 고기 덩어리를 12~16시간 동안 저온에서 익혀 내는 요리다. 양념이나 요리법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바비큐만 먹는 여행을 했다. 지역마다 김치 맛이 다르듯 미국의 51개주에선 저마다의 요리법으로 바비큐를 만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텍사스, 시카고를 거쳐 오는 일정으로 20일이 넘게 걸렸다. 그때 맥주가 늘 곁에 있었다. 그는 “맥주 종류에 따라 바비큐의 맛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맥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맥주를 공부하기 위해 시서론 가이드북이라는 것을 샀다. 책을 보며 맥주 50종을 2병씩 사 비교하며 마셨다. 100병을 모두 마시고 나니 조금은 맥주를 알것 같았다. 그는 “맥주를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자격증을 땄다”고 말했다.
시서론 준비는 쉽지 않았다. 학원이나 교과서가 있는게 아니라 혼자서 공부해야했다. 시험 주관사에서 알려주는 것은 시험에 들어가는 범위를 적은 목차와 2008년 시험 문제 뿐 이었다. 목차를 만들고 정보를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인터넷 등에서 상충되는 정보를 발견하면 학교 선생님에게 묻거나 주관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아무리 해도 잘 모르겠더군요. 무작정 한번 시험을 보고 감을 익혔습니다. 두번째 본 시험에서 합격했죠.” 그는 2014년에 한국인 최초로 시서론 자격증을 땄다.
◆맥주의 세계는 무궁무진, 제대로 알리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 셰프는 동기들과 함께 바비큐 전문 레스토랑을 열고 미국식 바비큐와 그에 어울리는 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맥주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두달에 한번 정도 다른 시서론들과 만나 세미나도 진행한다. 손 셰프는 “커피와 맥주, 치즈와 맥주 등으로 맥주의 다양한 활용 방법을 연구한다”며 “홉, 효모, 맥아, 물의 비율을 조금만 바꿔도 맛과 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공부할 것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맥주 저변을 넓히기 위한 활동도 하고 있다. 경희대 대학원에서 맥주 테이스팅 강의를 하고 있으며, 수제맥주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의 수제맥주 브랜드인 브루클린 브루어리의 홍보대사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최근 맥주에 대한 관심 늘고 있는 것을 긍정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공부만 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경계했다. 손 셰프는 “맥주 자격증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데 이것만 생각하면 맥주를 싫어하게 될 수 있다”며 “맥주를 잘 알고 싶다면 일단 많이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올해 목표는 공인 시서론의 다음단계인 어드밴스드 시서론에 도전하는 것이다. “1호 공인 시서론이라는 점때문에 관심을 많이 받는데 능력이 따르지 않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더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늘 새로운 맥주와 정보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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