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 500유로 발행 중단
현금과세방안 경기부양효과 의문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유럽중앙은행(ECB)이 최고 권종인 500유로 발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500유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미국에서도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등이 100달러 폐지를 주장해온 만큼 앞으로 어떤 조치가 나올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500유로 발행 중단 이유는 외형상 이렇다. 갈수록 대안화폐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고액권일수록 화폐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대신 뇌물, 탈루수단 등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 ECB의 인식이다. 심지어 이슬람국가(IS) 등의 테러와 조직범죄 재원으로 사용돼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500유로 발행 중단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마이너스 금리 예치제도 효과를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제도는 은행이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해 쉽게 영업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출하라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경험국의 사례를 보면 이 제도는 궁극적으로 민간 예금의 마이너스 금리로 귀착된다.
민간이 예금할 때 마이너스 금리 ?수수료를 낸다면 여유 자금을 은행에 예치하기보다 소비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반대 상황이 발생한다. 오히려 마이너스 금리 도입 이전에 예치했던 예금까지 인출해 시장에서 퇴장시킨다. 이때 고액권을 선호하면서 금융과 실물 간 연계성이 떨어져 경기가 더 침체된다.
고액권 회수율을 보면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에서 100달러 회수율은 2013년 82%에 달했지만 2014년에는 75.3%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중 500유로 역시 102.1%에서 88.7%로 급락했다. 한국은 더 심하다. 지난해 5만원권의 회수율은 40.1%에 그쳐 미국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금융권에서 돈이 퇴장하면 경제 활력이 떨어진다. 마이너스 금리제도 도입 이후 유럽, 일본의 대표적인 경제 활력 지표인 통화유통속도(국내총생산(GDP)/통화량(M2))와 통화승수(통화량(M2)/본원통화량)가 감소하는 추세가 뚜렷하다. ECB, 일본은행(BOJ)을 중심으로 각국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대목이다. 한국은행도 마찬가지다.
마이너스 금리제도는 정책무력화 명제와 연관이 있다. 통화정책 무용론이 제기된 지는 오래됐다. 경제주체가 미래를 불확실하게 생각함에 따라 금리인하와 총수요 간 민감도가 떨어지면서 ‘통화정책 전달경로(통화공급→금리인하→총수요 증가→경기회복)’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이 제로금리 정책을 일제히 추진함에 따라 이제는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더 내릴 수 없는 국면이 됐다. 한 나 瓚?적정 금리를 따지는 피셔 공식, 테일러 준칙, 수정된 테일러 준칙 등 어떤 방안으로 금리수준을 평가하더라도 대부분 국가의 금리는 적정 수준에 비해 크게 낮게 나온다.
마이너스 금리제도는 일종의 화폐 환상인 민간의 ‘부채 경감 신드롬’을 이용하기 위해 적정 수준보다 낮은 금리를 더 떨어뜨려 경기를 부양하는 극약 처방이다. 하지만 가계부채 부실 등과 같은 경제주체의 현금 흐름에 문제가 있으면 경기부양 효과보다 또 다른 위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만만치 않다.
월럼 뷰이터 씨티그룹 이코노미스트 등이 “앞으로 현금만 들고 있으면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헬(hell·지옥) 세금’ 방안을 주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조치를 강구해서라도 시중에 돈을 돌릴 수 있어야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는 절박감에서 나오는 구상이다. 모든 현금을 폐지해야 한다는 초강경 급진적인 방안도 나오고 있다.
중요한 것은 최고 권종 발행 중단, 보유현금 과세, 현금 폐지 등을 강구한다면 과연 경기가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어떤 방안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여유 자금(현금)을 써야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 총수요 항목별 기여도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육박하는 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울트라’ 금융완화정책을 추진해 왔지만 소비는 살아나지 않았다. 세계 경제도 저성장 국면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종전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뉴 노멀’ 환경이 도래함에 따라 경제주체가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이다.
항상소득가설(밀턴 프리드먼), 생애주기가설(안도, 모딜리아니) 등 소비이론에 따르면 미래가 불확실해질수록 그만큼 기대소득(항상소득)이 높아져야 소비를 늘릴 수 있다. 마이너스 금리제 등은 기대소득을 낮추는 요인이기 때문에 소비보다 저축을 늘리는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난다. 미래 불확실성을 줄여줘 통화정책 전달경로가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근본 처방이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