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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공부] "내 살림은 내 것으로" 물산장려운동, 윤봉길, 폭탄 투척…항일정신 이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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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16)



3·1 만세운동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이 자극제가 돼 일어났습니다. 자기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하게 두라는 것이 민족자결주의의 핵심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우리 민족이 일본과 다른 민족이고 대한제국이 자주 독립국이었음을 세계 여러 나라에 밝히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힘을 가진 여러 나라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습니다. 1921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태평양평화회의 등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문제는 회의 주제로 선택되지도 못했습니다.

태평양평화회의에서 외면받다

우리 민족은 크게 실망했지요. 하지만 그냥 포기하거나 넋 놓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당장 독립을 맞이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 민족이 힘을 기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며 실력 양성에 다시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일어난 대표적인 실력 양성 운동은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등이었습니다. 또 6·10 만세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 등 3·1운동의 맥을 잇는 항일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물산장려운동은 1907년 일어났던 국채보상운동과 그 성격이 비슷했습니다. 국산품을 사용하고 근검절약해 민족 기업을 키울 자금을 마련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민족 기업이 많아지면 우리 민족이 경제 자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통해 일본에 맞설 힘도 갖추게 될 것이라는 게 이 운동의 취지였습니다.

‘내 살림은 내 것으로’라는 표어를 내건 물산장려운동에는 전국 각지의 많은 국민이 호응했지요. 하지만 일본은 이 운동을 항일 민족운동으로 여겨 심하게 탄압했습니다. 또 국산품을 쓰고 싶어도 늘어난 수요에 맞게 국산품을 생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기대하던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습니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은 우리 민족의 교육을 일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기 위해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우자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한민족 천만이 한 사람이 일원씩’이라는 구호 아래 모금이 시작됐고 이 또한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지요. 하지만 역시 일본의 방해 때문에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가뭄과 수해가 계속돼 국민 경제가 어려워져서 모금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 주도로 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총독부는 서둘러 경성제국대를 설립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어난 대표적인 시위 운동으로는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을 꼽을 수 있습니다. 6·10 만세운동은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식 날인 1926년 6월10일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맞춰 일어났지요. 이런 날에는 세상을 떠난 황제를 추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또 황제의 죽음에 대한 슬픈 감정이 나라를 잃은 설움과 분노로 바뀌기 쉽지요. 그래서 시위를 계획하는 사람들은 이런 날을 선택한 것입니다.

6·10 만세운동 등 격렬 저항


그런데 시위가 일어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본 경찰은 주동자를 모두 잡아가두고 독립선언문도 빼앗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시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갈 뻔했지요. 이때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나섰습니다. 장례 행렬 주위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친 것입니다. 시위대는 일본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해산됐지만 이후 일본에 저항하는 학생 운동은 계속됐습니다.

1929년 10월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학생들이 우리 여학생들을 조롱하고 모욕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광주를 떠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을 때 일본 학생 몇 명이 박기옥 등 광주여고보 학생들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 등은 크게 분노해 일본 학생들과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마구 때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다음해 3월까지 계속된 광주학생운동에는 250여개 학교, 5만여명이 참여했고 잡혀가거나 퇴학 또는 무기정학 당한 학생은 3000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나라 안에서 일본에 대한 저항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독립 운동가들은 나라 밖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독립군이 창설돼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또 1932년 4월29일 戮?운동 역사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인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습니다.

윤봉길은 광주학생운동에 자극 받아서 만주로 망명했다가 큰 뜻을 품고 상하이임시정부를 찾아갔습니다.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일본의 전승 축하 행사장에서 단상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본군 대장 등 여러 명의 일본인이 죽거나 다쳤지요.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일본에서 처형됐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상하이임시정부를 압박해 우리 정부 요인들을 잡아갔습니다. 이때 안창호도 감옥에 갇혔고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됐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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