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열 기자 ] 대기업집단지정제도는 매출, 이익 등이 소수의 특정 대기업에만 집중되는, 이른바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자는 게 근본 취지다. 규모가 일정 기준 이상인 기업을 선정해 규제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에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도입된 제도다. 외식업, 동네 빵집, 벽시계, 안경테, 우산 등 70여개 업종은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지정해 아예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 시대에 이런 제도가 과연 효과가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한국 대기업은 미국 중국 등의 대기업에 비하면 ‘덩치’가 왜소하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천이 매출을 기준으로 선정한 ‘2015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 대기업은 17개뿐이다. 미국(128개)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뿐더러 중국(98개)의 5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친다. 중소기업적합업종 지정제도가 오히려 해당 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으로 집중됐다고 하는 통계들이 부풀려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국 17개…美 128개, 中 98개
매출은 기업의 덩치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다. 국내총생산(GDP)이 한 나라 경제 규모를 보여주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포천이 매출을 기준으로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은 덩치 큰 기업들의 국가별 분포를 보여준다. 한마디로 경제 강국일수록 500대 명단에 포함된 기업이 많다. 선두는 128개 기업이 선정된 미국이다. 중국도 98개로 100개를 육박한다. 중국은 2011년 61개에서 98개로 4년간 무려 37개 늘었다. 국제사회에서 급속히 커져가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그대로 반영한 숫자다. 일본도 54개로 한국(17개)의 세 배를 넘는다. 프랑스(31개), 영국(29개), 독일(28개)도 한국을 크게 앞선다. 한국 기업으로선 앞으로 덩치가 더 커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융회사 덩치는 ‘왜소한’ 수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LG화학 등을 선두로 한 반도체·전자·자동차·철강·화학 등은 한국이 나름 경쟁력이 있는 분야다. 하지만 시장 개방으로 국제 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해져 언제 경쟁력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추격세가 워낙 거세다.
수십년간 세계 정상을 자랑하던 조선(造船)의 쇠락은 ‘글로벌 경쟁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내 기준으로 덩치를 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국제무대의 경쟁은 금융시장에서 더 심하다. 국제무대에 서려면 한국 금융회사들이 덩치를 훨씬 더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한마디로 국 ?금융회사는 ‘초라한’ 수준이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모건스탠리 등 월가의 대표급 투자은행들과 견줄 만한 금융회사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의 효과?
대기업으로 경제력이 집중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는 일부 업종에 대해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한때 중소기업 고유업종으로 불리다가 이름을 바꿔 지금은 중소기업적합업종으로 운영되는 제도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수시로 제기된다. 우선 개방경제 시대에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서 보호 효과가 있느냐는 점이다.
실제 부산 경남 지역의 경우 소매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 할인점의 진출을 금지하자 일본 업체들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보호 업종의 경쟁력은 되레 악화될 수 있다. 당장은 중소기업적합업종에 있는 기업들이 혜택을 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그 업종의 기업들이 결국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경제력 집중 측정의 함정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경제력 집중을 억제함으로써 예상되는 반독점의 폐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경제력이 과도하게 집중됐다는 통계는 찾기 힘들다. 일부에서 제시하는 GDP 대비 매출은 경제력 집중도를 과장한다.
삼성전자 매출에는 삼성전자에 부품을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매출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는 GDP를 계산할 때 최종생산물의 시장가치를 모두 합치거나, 모든 부가가치를 합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12년 30대 기업집단의 매출이 한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0.7%로 매출이 GDP보다 많았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경제력집중 통계의 허와 실’ 보고서를 통해 “경제력집중을 평가할 때 GDP 대비 매출 비중은 집중도를 과장하게 된다”며 “매출이 아닌 부가가치를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볼 때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유럽 강소국가보다 경제력이 집중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 비중이 높기는 하지만 이들의 경제집중도와 세계적인 시장 개방 추세를 감안할 때 일률적인 규제 정책이 바람직한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 이분법으로 사회를 보는 '언더도그마'
‘언더도그마(underdogma)’는 세상을 강자·약자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다. 강자는 악하고, 약자는 선하다는 편견이다. ‘큰 것’은 언제나 ‘작은 것’을 착취한다는 오류적 믿음이다.
사회를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은 원래 사회계급론 갈등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사회관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주장한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사회를 이런 시각으로 보는 학자는 거의 없다. 사회는 두 계급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이해 관계자들이 모여 서로 교류하고 이해 관계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분법적 사고는 선거에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으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편 가르기 탓도 크다.
한국에서 경제민주화가 마치 ‘대기업의 횡포’를 규제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도 언더도그마적 사고와 무관치 않다. 경제민주화의 본질은 정부 간섭을 줄여서 시장을 민주화하는 데 있다. 하지만 최근 경제민주화는 경제 주체의 평등화라는 의미로 잘못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경제는 ‘1원 1표’에 의해 움직이지 ‘1인 1표’에 움직이지 않는다. 경제에 ‘1인 1표’ 개념을 적용해 평등화를 요구한다면 누가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벌려고 하겠는가.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