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첫사랑은 하늘의 선물
‘첫사랑’만큼 아련한 단어가 있을까.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언제 첫사랑을 했느냐는 질문에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무미건조한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가 아득해지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첫사랑의 기억이야말로 하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쉽고 가벼운 세태다. 빨리 왔다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강렬한 첫사랑이 찾아오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에 등장하는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도 16세에 딱 한 달간 엄청난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성숙해진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첫사랑>은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1000명의 농노를 거느린 6세 연상의 부유한 여지주와 결혼했다. 못생긴 데다 포악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다퉜는데 <첫사랑>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부모도 비슷한 삶 ?산다. 침착한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10세 연상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16세 소년과 21세 여인
1818년 태어난 투르게네프가 쓴 2세기 전 첫사랑 이야기, 진부하기는커녕 읽다 보면 함께 사랑의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뤄지지 않은 첫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함께 아파하고, 아직 첫사랑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곧 다가올 그 만남을 상상하며 가슴 떨릴 것이다.
<첫사랑>의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심장이 마구 뛰면서 젊은 피가 용솟음치고, 가슴 속에 우스꽝스러운 동경이 가득 차 있고, 모든 것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뭔가를 기다리는 16세 소년’이다. 어느 날 별채에 가난한 공작부인 가족이 이사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네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작부인의 딸, 키가 훌쩍 크고 날씬한 그녀를 보는 순간 ‘벅찬 놀라움과 기쁨으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다. 블라디미르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공작부인의 집에 갔다가 그녀와 마주하게 된다.
숨 막히는 첫사랑이 시작되다
지나이다 알렉산드로브나. 21세인 그녀는 자신만만한 외모만큼이나 당당하게 블라디미르에게 털실 감는 걸 도와달라고 하고, 그날 소년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추종하는 다섯 명의 남자(시인, 백작, 의사, 대위, 경비병)들 틈에 끼어 사랑 경쟁을 하게 된다. 거의 매일 지나이다의 집에 모여 그녀가 생각해내는 기발한 게임을 하면서 즐겁게 논다. 그녀의 손등에 키스할 기회를 엿보는 남자들 틈에서 벌칙으로 그녀와 나 銃?붙어 앉아 비단 숄을 뒤집어쓰게 된 블라디미르.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눈동자, 입김에 숨이 막힐 뻔한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마치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다. 소설에 소년이 첫사랑에게 느끼는 순수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지 공감하게 만든다.
블라디미르는 다섯 명의 청년과 경쟁하면서 지나이다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하지만 곧 지나이다가 다섯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다. 더욱이 자신을 시종으로 임명해 시중들게 하는 지나이다가 자신을 귀여운 동생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깨닫지만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멈출 줄 모른다.
어느 날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블라디미르는 충격에 빠진다. 16세 소년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장면까지 목격하고 첫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블라디미르는 태풍같이 지나간 한 달간의 첫사랑으로 갑자기 성숙한 자신을 만난다.
사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첫사랑의 열병을 가슴에 묻고 블라디미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뇌일혈로 세상을 떠난다.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황홀한 행복, 서서히 퍼지는 독을 두려워하라’는 편지를 남긴 채.
하지만 블라디미르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첫사랑의 환영을 오직 한 가닥 한숨과 쓸쓸한 함정 속에 묻어두려 했던 내가, 嚮?어떻게 풍요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자문하며 사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첫사랑>은 마치 택이네 방에 모여 함께 웃고 떠드는 쌍문동의 다섯 청춘을 떠올리게 한다. 비록 지나이다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지만 다섯 남자가 시를 읊고 기이한 게임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 정겹다.
투르게네프가 1860년 집필한 <첫사랑>은 ‘그것은 1883년 여름의 일인데, 나는 그때 열여섯 살이었다’로 시작한다. 마치 자신이 죽는 해를 알기라도 한 듯. 투르게네프는 실제로 평생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 1883년 세상을 떠났다. 강렬한 첫사랑을 꿈꾼다면, 첫사랑의 기억으로 여전히 가슴이 저민다면,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만나라.
이근미 < 소설가 >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